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윤비(尹妃)마마’라고도 불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는 망국의 비운을 지켜보며 불문(佛門)에 귀의한 후 일생을 수행자처럼 살았다. 올해는 순정효황후가 서거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1966년 2월 3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순정효황후는 용성ㆍ향봉 스님과 인연이 깊었으며, 서울 대각사 창건을 비롯해 불교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황후의 위패와 영정은 강릉 백운사(주지 법안스님)에 봉안돼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지만 국모의 기품이 느껴지는 순정효황후의 말년 모습.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1966년 2월 13일 순정효황후 장례식이 30여 만명의 애도 속에 엄수됐다. 장례기간 내내 빈소에 머물며 고인을 추도한 향봉스님을 비롯해 추담스님, 동헌스님 등 스님들이 운구행렬의 뒤를 따르고 있다.
“… 남은 여생을 오직 불전(佛前)에 귀의하며 세월을 보내던 중 뜻하지 않은 6ㆍ25동란을 당하자, 한층 더 세상이 허망함을 느꼈던 중, 내 나이 70여 세 되오니, 불(佛)세계로 갈 것 밖에는 없어, 내 뜻을 표하노니…” 사바세계와 이별을 직감한 순정효황후가 미리 써 놓은 유서로 불교와의 깊은 인연을 짐작하게 한다.
말년을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렀던 황후는 매일 두 차례 좌선(坐禪)을 하고, 독경(讀經)을 하며 일과를 보냈다고 한다. 처소에는 용성스님이 저술한 한글번역본 경전과 작은 탱화가 모셔져 있었다. 강릉 백운사 주지 법안스님은 “순정효황후가 낙선재 내부에 ‘나무 불, 나무 법, 나무 승’ 글씨를 붙여놓고 드나들 때마다 염송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한일강제병합으로 망국(亡國)의 운명을 맞이하면서였다. 특히 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던 용성(龍城)스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기록이 전한다. “(1921년) 윤비 마마와 최상궁 마마와 고 대일화 상궁마마께서 서울 봉익동 3번지 민가(民家)를 구입해서 긴급히 개조하고 수리하여 … 대각사의 문호(門戶)를 다시 열고 용성 진종 조사를 모시고 …” 창덕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각사를 창건하도록 후원했음을 알 수 있다. 용성스님이 3·1운동에 참여해 투옥됐다가 출옥할 때는 일제의 감시에도 서대문 감옥으로 최상광명 상궁을 보냈다. 또한 용성스님이 만주 봉녕촌에 선농당화과원(禪農堂花果院)을 설립할 때 7백 정보 가량의 농토를 구입하도록 후원했다.
순정효황후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1906년 권력을 거머쥔 파평 윤씨 집안의 후원으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로 책봉됐지만,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간절했다. 1910년 어전회의에서 한일강제병합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듣고, 국새(國璽)를 치마폭에 감춘 일화는 유명하다. 비록 숙부 윤덕영에게 국새를 빼앗겼지만 황후의 강단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황후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용성스님과 인연이 닿았으며, 총독부의 눈을 피해 은밀히 지원했다. 일생은 검소했다. 왕비가 된 후 친정아버지가 궁궐에 들어오자, 은그릇으로 12첩 반상(飯床)을 올리게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빈 그릇이었다. 소박하고 검소한 마음을 엿볼 수 있으며, “허울만 좋은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조선)이 망한 후 이왕비(李王妃)로 격하된 순정효황후는 불교에 귀의했다. 지금까지 각종 자료에는 법명이 대지월(大地月)로 나오는데, 사실은 ‘땅 지(地)’가 아닌 ‘지혜 지(智)’이다. 황후 서거 당시 한 언론에서 잘못 표기한 한자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강릉 백운사에 봉안된 위패도 지혜 지를 쓰고 있으며, 황후와 인연이 깊은 향봉(香峰)스님이 1960년 저술한 〈수양(修養)의 다화(茶話)〉의 시주질(施主秩)에 실린 ‘尹大智月陛下(윤대지월폐하) 聖壽萬歲(성수만세)’라는 대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지만 황후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구황실의 재건을 바라지 않은 정부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미처 피난가지 못했다. 미아리를 통해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 기마병들이 다발총으로 무장한 채 들이닥쳤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상궁들이 “이 분이 조선의 왕비마마”라고 만류하고, 황후의 위엄을 보이자 인민군들이 물러났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하에서 서울에 머물던 황후는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다. 처음에는 경남도지사 관사에 머물렀지만, 며칠 되지 않아 범어사 동래포교당(부산 법륜사)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산스님을 비롯한 용성스님의 제자들이 신경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의친왕이 동래포교당에 오면서 그마저 내줄 수밖에 없었다. 황후를 모시던 김명길 상궁은 생전에 부산 피난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동래로 내려갔다. 동래에 있는 경남지사 사택에 있었다. 황후는 그곳에서 오래 누를 끼치기를 바라지 않아 동래포교당이란 묵은 사찰로 옮겼다. 황후의 노후가 불행했다면서 그 적빈(赤貧)과 괴로움 속에서도 한 번도 얼굴을 흐리지 않았다. 포교당에서는 승려가 시주든 것과 불교도의 도움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황후는 어느 시민의 친절을 끝내 잊지 못했다. 사찰 생활의 어려움을 본 어떤 이가 구포(龜浦)에 집 하나를 소개했다. 그곳에서 정부가 환도하는 날까지 서민과 같은 생활을 했다.”
서울로 돌아온 황후는 창덕궁에 머물지 못하고, 한 독지가의 별장인 수인재(修仁齊)에서 생활하다 1960년 4ㆍ19이후에야 창덕궁 낙선재에 돌아갈 수 있었다. 순정효황후는 향봉(香峰)스님과 교유하며 신행 생활을 했다. 황후는 “향봉스님은 청렴결백하고 누구보다 수행을 잘 하는 분”이라면서 신뢰했다고 한다.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한 향봉스님이 상경하면, 조계사나 선학원으로 상궁을 보내 보시금과 담요 등 물품을 전하기도 했다. 향봉스님은 순정효황후 서거후 9일장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만장 제작을 지휘하는 등 장례의식을 면밀히 살폈다. 황후의 49재를 강릉 백운사에서 지낸 것도 향봉스님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한편 황후는 김명길 상궁을 통해 한국의 전통 다도(茶道)를 명원 김미희 선생에게 전하도록 했다. 명원의 다맥(茶麥)은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별세 이후 ‘마지막 황후 윤비’라는 영화가 개봉해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인 김지미, 이예춘, 조미령, 한은진, 황정순 씨 등이 출연했다. 황후 역은 김지미 씨가 맡았고, 메가폰은 이규웅 감독이 잡았다. 서울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당시 10만 명을 넘어서는 영화는 1년에 1, 2편 나오기가 어려웠음을 감안할 때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불교에 귀의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았던 순정효황후는 1966년 2월 3일(음력 1월 13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사바와의 인연이 다했음을 직감한 황후는 목욕재계 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윤비로 불리던 황후는 그해 2월 7일 순정효황후로 시호(諡號)가 결정됐고, 2월 13일 순종이 잠든 유릉(裕陵)에 안장됐다. 그 후 위패와 영정은 강릉 백운사에 모셔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49재는 향봉스님이 주관하고, 오대산 상원사 선원 수좌와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백운사에서 봉행됐다. 비록 서거 50년이란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순정효황후의 불연(佛緣)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