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심마是甚麽 화두話頭에 병을 간택揀擇함 2. 화두가 좋은 화두가 있다 함을 간택함 3. 시심마 화두가 백천百千 화두에 근본根本 된다 함을 간택함 4. 모든 화두마다 본의심本疑心이 있으며, 또 병病 된 것을 가림 5.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데 모든 병통을 자세히 밝힘 6. 화두참구話頭參究하는 모양模樣 7. 공부에 불가불不可不 마군魔群이를 알아야 할 것 8. 마가 도덕을 해롭게 하는 연유를 밝힘 9. 도를 해롭게 못함을 밝힘 10. 외도의 괴수된 자만 가림 11. 색음色陰이 녹을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남 12. 수음受陰이 녹아지고자 함에 열 가지 마군이가 나는 것 13. 상음想陰이 녹아질 적에 열 가지 경계가 나는 것 14. 외도의 종류를 밝힘 15. 행음과 식음이 다 녹지 못하고 그 가운데 앉아 외도 됨을 밝힘 16. 상무상외도
비유하면 큰 나무는 가지와 모든 꽃과 열매가 다 뿌리로 인하여 있으니 나무를 기르려면 뿌리를 북돋워야 비로소 잘 사는 것이다. 또한 나무를 베려고 하면 뿌리를 제거해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마음을 알고서 도를 닦으면 곧 공이 적게 들어도 이루기 쉽고, 만일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이에 공력만 허비하고 이익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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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知하라 一切善惡이 皆由自心하며 心外別求는 終無是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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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알아라. 일체 선과 악은 모두 자기 마음(自心)으로 연유하니, 마음 밖에 별도로 구하는 것은 마침내 옳지 못하느니라.
또 답하시길, “사대오온이사대란 땅과 물과 불과 바람, 이 네 가지로 몸이 된 것이고, 오온은 빛과 받아들이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하는 것과 아는 것, 이 다섯 가지이다. 본래 공하여 내가 없음을 알며,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두 가지 차별이 있음을 알 것이다. 어찌하여 둘인가? 첫째는 깨끗한 마음이고, 둘째는 더러운 마음이다. 그 깨끗한 마음은 곧 이 새는 것이 없는 진여심이요,眞如는 不染曰眞이요, 不二曰如 그 더러운 마음은 곧 샘이 있는 무명심이니,無明은 어두운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이 자연히 본래 같이 있어금돌을 가지고 돌이 먼저 생긴 것인가 금이 먼저 생긴 것인가. 비록 인연으로 화합하였다고 할지라도緣散則眞妄이 都無實體이니라. 서로 상생하지는 못하느니라.眞은 眞이라 妄을 不生하고 妄은 妄이라 眞을 不生하나니라.
청정한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을 좋아하고, 더러운 마음은 항상 악한 업을 생각한다. 만일 진여眞如가 스스로 깨달아 그 깨달음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면 성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드디어 모든 괴로움을 멀리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증득할 것이다. 만일 더러운 마음으로 악을 지어 그것을 받아 얽히고 덮이면 범부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삼계에 빠져 가지가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저 더러운 마음이 진여의 본체를 가리기 때문이다.”
『십지경』에 이르시기를, “중생의 몸에 금강과 같은 각성이 있으니 마치 태양날 바퀴와 같아서 그 본체가 밝고 원만하여 광대무변廣大無邊하다. 다만 오음의 검은 구름에 덮여서 마치 병 속에 있는 등불의 광명이 능히 드러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다. 또 『대원적경(열반경)』에 이르시기를, “일체중생이 다 각성이 있으나 무명에 덮였기 때문에 해탈解脫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각성覺性이라는 것은 깨달은 것이니, 다만 능히 스스로 깨달아서 깨달은 지혜가 밝아 그 덮인 바를 여의면 곧 해탈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일체 모든 착한 것이 깨달음으로 뿌리를 삼는다. 그 깨달음의 뿌리로 인해서 드디어 능히 모든 공덕이 나타나니 원적의 열매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마음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요달함이라고 하느니라.
혜가가 묻기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두운 마음과 일체 모든 악은 무엇으로써 뿌리가 됩니까?” 달마 대사께서 답하시기를, “어두운 마음이 비록 팔만사천 번뇌와 정욕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모든 악이 무량무변하지만, 간략하게 간추려서 말한다면 다 삼독으로 인해서 근본이 되느니라.”
그 삼독이라는 것은 곧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다. 이 삼독심이 자연히 본래 일체 악을 갖추어 있는 것이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지만 생겨난 가지와 잎의 수효가 한량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 삼독 뿌리도 낱낱 뿌리 가운데 모든 악업이 생기는 것이 백천만억 배나 되지만 그것은 앞의 것보다 비유하지 못할 정도로 많으니라.
이와 같은 삼독은 하나의 본체本體에서 스스로 삼독이 된 것이다. 만일 뻑뻑이(마땅히) 육근六根에 나타나게 되면 또한 육적六賊이라고 이름한다. 육적이라는 것은 곧 육식六識이다. 이 육식이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뿌리로 출입하여 일만 경계를 탐착함으로 말미암아서 악업을 지어 진여를 장애한다. 그러므로 육적이라고 이름한다.
일체중생이 이 삼독과 육적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을 미혹되어 어지럽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생사에 빠지며, 육취에 윤회윤회는 수레바퀴 굴리듯 하는 것하게 된다. 이는 모든 고뇌苦惱를 받는 것이 마치 큰 강물의 근원이 작은 샘에서 졸졸 흘러 끊어지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길게 이어져 철철 넘쳐 파도가 만 리에 출렁이게 되는 것과도 같다.
또 답하기를, “만일 중생이 정인正因은 覺性에 正다운 因을 알지 못하고을 알지 못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선을 닦으면 삼계를 면치 못하여 세 가지 가벼운 갈래에 태어나니, 무엇이 세 가지 가벼운 갈래가 되는가? 미혹한 마음으로 열 가지 선을 닦아 망녕되이 쾌락을 추구하면 탐내는 경계를 모면하지 못하여 하늘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다섯 가지 계를 가져 망령되이 미워하고 사랑하게 되면 성내는 경계를 모면하지 못하여 인간에 태어나며, 미혹한 마음으로 세상 유위법을 집착해서 삿된 것을 믿어 복을 추구하면 어리석은 경계를 모면하지 못하여 아수라의 갈래에 태어난다. 이러한 분류를 통틀어 세 가지 가벼운 갈래라고 말하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무거운 것(갈래)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삼독심을 풀어 놓아 오직 악업만을 짓는 것이다. 만일 탐욕의 업이 무거운 자는 아귀의 갈래에 떨어지고, 성냄의 업이 무거운 자는 지옥의 갈래에 떨어지며, 어리석음의 업이 무거운 자는 축생의 갈래에 떨어진다. 이러한 세 가지 무거운 것을 앞의 세 가지 가벼운 것과 합쳐서 마침내 여섯 가지 갈래를 이루느니라.
또 혜가의 아승지를 묻는 것에 답하기를, “이것은 곧 삼독심이니 인도에서는 아승지라 하는데 한漢나라의 말로는 불가수不可數라 한다. 이 마음에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악한 생각이 있는데 하나하나의 생각 가운데 모두 한 겁씩 있다. 또 항하사라 하는 것은 가히 헤아리지 못한다는 말이니, 삼독의 악한 생각이 모래 수와 같기 때문에 불가수라 하느니라.”
진여의 성품이 이미 삼독에 덮여 있기 때문에 만일 저 모래 수와 같은 악한 생각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어찌 해탈이라 이름하겠느냐! 이제 능히 탐·진·치 등 삼독심을 제거하면 곧 삼(대)아승지겁을 지낸 것이다. 말세 중생들이 어리석고 근기가 둔하여 대각(부처님)의 매우 깊고 미묘한 이치와 삼아승지겁의 비밀한 말씀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말하기를, ‘이 티끌 수와 같은 겁을 지내야 비로소 깨달음을 이룬다’고 한다. 이는 말겁에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잘못 의심하게 하여 깨달음의 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묻기를, “삼취정계라고 하는 것은 맹세코 일체 악을 끊고, 맹세코 일체 선을 닦으며, 맹세코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직 삼독심을 제어하기만을 말씀하시니 어찌 경문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하기를, “대각(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이 진실하여 마땅히 틀림이 없느니라. 대정사(보살마하살)가 저 과거 인행因行중에 정사행(보살행)을 닦을 때에 삼독이 있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 서원을 발해서 삼취정계를 지니시니, 항상 계戒를 닦은 것은 탐심에 대하는 것이라서 맹세코 일체 악을 끊기 때문이고, 항상 정을 닦는 것은 진독嗔毒을 대한 것이어서 맹세코 일체 선을 닦기 때문이며, 항상 지혜를 닦는 것은 치독痴毒을 대한 것이어서 맹세코 일체중생을 제도코자 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계와 정과 혜 등 세 가지 청정한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저 삼독의 악업을 벗어나서 대각의 도(불도)를 이룬다. 능히 삼독을 제거하면 모든 악이 소멸하기 때문에 끊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능히 삼취정계를 가지면 모든 착한 것이 구족하기 때문에 닦는다고 이름한다. 능히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만행이 성취되어 자타가 모두 이익 되어 널리 일체중생을 건지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한다.度는 苦海를 건넌다는 뜻 그러므로 계행을 닦는 것이 마음을 떠나는 것이 아니니라.
만일 자기 마음이 청정하면 일체중생이 다 청정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기를, “마음이 더러우면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라고 하셨다. 또 이르시기를, “깨달음의 나라(佛土)를 청정하게 하려면 먼저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할지니, 그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 곧 깨달음의 나라가 청정하리라.”라고 하셨다. 만일 능히 삼독심을 제어하면 삼취정계를 스스로 능히 성취하리라.
묻기를, “육도란 이른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 여섯 가지이거늘 이제 육근만 청정한 것으로 육바라밀이라 이름하시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답하기를, “육도를 닦고자 한다면 마땅히 육근을 깨끗이 하고, 육근을 깨끗이 하고자 하면 먼저 육적을 항복 받아야 한다. 능히 눈의 도적을 버리면 모든 색의 경계(色境)를 떠나 마음에 인색함이 없기 때문에 보시라고 한다. 능히 귀의 도적을 막으면 저 소리의 경계에 풀어 놓지 않기 때문에 지계라고 한다. 능히 코의 도적을 항복 받으면 향기와 악취에 평등하고 자재하게 길들이기 때문에 인욕이라고 한다. 능히 혀(舌)의 도적을 제어하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아니하며 노래하고 찬탄하며, 강의하고 연설하되, 마음에 피곤함이 없기 때문에 정진이라고 한다. 능히 몸의 도적을 항복 받으면 모든 닿는 욕심에 맑아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선정이라고 한다. 능히 뜻의 도적을 조복시키면 어두운 마음을 따르지 않고, 항상 깨친 지혜를 닦아서 모든 공덕을 즐기기 때문에 지혜라고 한다. 또 ‘도度’라는 말은 ‘건넌다’는 말이니, ‘건넌다’는 것은 운반한다는 것이다. 육바라밀은 비유하면 배와 뗏목과 같다. 능히 중생을 운반해서 저 언덕에 도달하기 때문에 육도六度라 하느니라.”
또 묻길, “대각께서 일찍이 서 말 여섯 되 젖을 마시시고 비로소 대각의 도를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어찌 오직 마음만 관觀하여 해탈을 얻겠습니까?” 대답하길, “각께서 말씀하신 젖을 먹는단 말은 세간의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 진여眞如의 청정한 법유이니라. 서 말이란 것은 삼취정계를 말하신 것이요, 육승六升을 말씀하시는 것은 육바라밀을 말씀하신 것이니, 각께서 도를 이루실 때에 이 청정한 법유를 잡수심을 말미암아 바야흐로 대각과(果)를 증득하셨다. 만일 대각께서 세간에 음욕과 화합한 것을 잡수시고 비린 냄새 나는 청정하지 못한 젖이라면 어찌 그것을 비방함이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각자는 이 금강과 같이 무너지지 않는 무루진신無漏眞身이시라. 길이 세간의 고통을 떠나셨는데, 어찌 반드시 이와 같은 부정한 젖을 구하여 기갈을 면하였겠는가! 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 소는 높은 언덕에도 있지 아니하고, 아래의 습한 땅에도 있지 아니하며, 곡식의 껍질과 재강과 밀 겨를 먹지 아니하고, 수소와 암소로 동일한 무리를 짓지 아니하니라. 그 소의 몸이 자마금색을 짓는다고 하시니라.
이 소를 말하자면 곧 광명이 변조한 각이시다. 대자비로써 일체를 연민히 여기시어 저 청정한 법체 가운데에서 이러한 삼취정계와 육바라밀의 미묘한 법유를 흘려 내시어 일체가 해탈을 구하는 자에게 법유를 주어 기르시니라. 유독 대각께서 그것을 마시고 도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도 만일 능히 마시는 자라면 모두 위가 없는 밝고 바른 참된 도를 얻으리라.
또 묻길, “경 가운데 성스런 전각을 조성하고 성스런 불상을 주조하고 그리며 향을 사르고 꽃을 흩으며 길이 밝은 등불을 켜며 밤과 낮의 육시로 행도함에행도는 도복과 법의를 입고 몸을 단정히 하여 성탑을 돌며 염불하는 것이다. 예배하고 재계하며 가지가지 공덕을 닦는 것으로 모두 각도를 이룸이라 하시니, 만약 오직 마음만 보는 한 법이 모든 행을 총괄하여 섭수하였다는 것은 반드시 허망합니다.”
답하길, “일체중생이 근기가 둔하고 지혜가 부족하여 깊고 깊은 미묘한 이치를 깨닫지 못함에 수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시려고 세상 유위의 일을 가자하시어 무위의 이치를 나타내시는데 그대는 그것을 알겠는가? 안으로 행을 닦지 아니하고 오직 밖으로만 구하여 복보를 희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라. 가람이란 말은 인도의 말로 이것은 청정한 곳이니, 만일 길이 삼독을 제거하여 항상 육근이 깨끗하고 몸과 마음이 고요(조촐)하여 내외가 청정하면 이것이 곧 가람을 닦음이니라.”
또 불상을 부어 짓거나 그리는 자는 곧 일체중생이 각도를 구하는 것을 표방하는 것이니라. 이른바 모든 대각의 행을 닦아 거짓 대각의 참다운 존안과 묘하신 모습을 형용한 것이니라. 어찌 쇠와 구리로 부어서 지어 만든 것이겠는가! 이 때문에 해탈을 구하는 자는 몸으로써 화로를 삼고, 법으로써 불을 삼으며, 지혜로써 공장을 삼고, 삼취정계와 육바라밀로써 묘법을 삼아 몸 가운데 진여각성을 단련하여 모두 일체 계율戒律 모범 가운데에 들어가 가르치심과 같이 받들어 행함에 하나도 어그러지고 새는 것이 없으면 자연히 대각의 형용을 성취할 것이니라. 이른바 구경에 상주하는 미묘한 법신(究竟常住微妙法身)이니라. 이 세상에 유위법과 같이 패괴敗壞하는 법이 아니니라. 만일 사람이 도를 구하되 진각眞覺을 조성하는 뜻을 알지 못하면 무엇을 의지하여 공덕을 이룬다고 말하겠는가!
향을 사르는 것은 또한 세간에 형상이 있는 향이 아니라 바로 이것은 함이 없는 바른 법의 향기이니라. 모든 냄새나는 더러움에 훈습함과 무명無明의 악업을 끊어 버리어 다 하여금 녹여 없애 버리는 것이니라. 그 바른 향에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계향이니, 이른바 모든 악을 끊고 능히 모든 선을 닦는 것이요, 둘째는 정향이니, 이른바 대근기를 깊이 믿어서 마음에 퇴전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혜향이니, 몸과 마음의 내외를 살펴보는 것이요, 넷째는 해탈향이니, 이른바 능히 무명에 결박된 것을 끊어 버리는 것이요,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니, 이른바 깨쳐 살피는 것이 항상 밝게 통달해서 걸림 없는 것이니라.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향이 최상의 향이다. 세간에 비교할 것이 없으니, 각께서 세상에 계시던 날에 모든 제자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값없는 보배의 향을 피워 시방 일체 각께 공양하였느니라. 금시의 중생들은 우치하고 근기가 암둔하여 대각의 진실하신 뜻을 알지 못하고 오직 밖의 불을 가져서 세간에 침수향과 전단향과 훈육향과 모든 물질의 장애가 있는 향을 불살라 복보를 희망하지만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꽃을 흩으면 한량없는 복을 얻느니라. 만일 말하길, “대각께서 모든 제자와 중생들로 하여금 고운 꽃을 베며 초목을 손상해서 꽃을 흩는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청정한 계행을 가지는 것은 모든 천지의 삼라만상에 하여금 닿아 죽이지 못하게 하며, 그릇 손상하는 자도 큰 죄를 얻기 때문이니라. 하물며 다시 지금에 더 청정한 것을 헐며 만물을 손상하여 복보를 구하겠는가! 유익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손상하는 것이라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또 장명등이라는 것은 바르게 깨친 마음이니, 깨달아 아는 것이 밝은 그것을 비유하여 등잔이라 하느니라. 이 때문에 일체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항상 몸으로써 등대를 삼고 마음으로써 등잔을 삼으며 믿는 것으로써 등불의 심지를 삼고 모든 계행으로써 등불의 기름을 삼으며 지혜가 밝은 것으로써 등불의 광명을 삼아서 항상 이와 같이 깨달음의 등불로써 일체 밝지 못한 어리석은 어두운 것을 비추어 파하는 것이니라. 능히 이 법으로써 굴리어 서로 열어 깨치게 하면 바로 하나의 등불이 백천 등불을 켜되 등불과 등불이 밝은 것을 이어서 마침내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장명등이라 하느니라.
과거에 각이 계셨는데 명호가 연등이시고 뜻도 또한 이와 같다. 우치한 중생들이 대각의 방편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허망함을 행하며 세상 유위법을 집착함으로 마침내 세간世間의 깨(蘇)와 기름(油)으로 등불을 켜서 빈집을 밝히고 각의 교칙을 의지하나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각께서 미간의 한 터럭에서 광명을 놓아도 오히려 동방으로 십만팔천세계를 비추시는데, 만일 몸의 광명을 다 나타낸다면 시방을 두루 비추나니, 어찌 이와 같은 세속의 등불을 가자함으로써 이익을 삼았겠는가. 이 이치를 자세히 살피면 마땅히 그렇지 아니한가.
또 육시에 행도하는 것은세상 사람이 행도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탑이나 각상이나 가운데에 두고 갓으로 빙빙 돌아다니는 것을 행도라 한다고 하나니 참 우치하오. 이른바 육근 가운데 항상 각도를 행하는 것이니라. 모든 깨친 행을 닦아 육근을 조복하여 길이 놓아 버리지 아니하는 것을 이름하여 육시행도라 하는 것이니라. 탑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을 표방한 것이니라. 항상 깨친 지혜로 몸과 마음을 둘러 순찰하는 것을 이름하여 요탑이라 하느니라. 과거에 모든 성현이 일찍이 도를 행하여 진락(열반)을 얻었거늘 세상 사람이 이치를 알지 못하니 어찌 행도라 하겠는가. 둔근들은 일찍이 안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밖으로 구하여 세간 탑을 돌되 일야에 빨리빨리 돌아다닌다. 한갓 스스로 피곤하여 어지러울 따름이니라. 저 참된 성품에 하나도 이익이 없을 것이니, 심히 불쌍하다.
또 재를 가진다는 것은 가지런히 하는 것이니, 이른바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다스려 산란심이 없게 하는 것이니라. 가진다는 말은 보호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계행에 여법하게 보호하여 가지는 것이니라. 반드시 육정을 엄금하여 삼독을 억제하며 부지런히 깨치고 살피어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할지니, 이와 같은 뜻을 알면 가히 재를 가지는 것이 되느니라.
또 재를 가진다는 것은 재식에 다섯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는 (법희식이니)44)
대각의 정법을 의지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는 것이니라. 둘째는 선열식이니 내외가 맑고 고요하여 몸과 마음이 즐거운 것이니라. 셋째는 염식念食이니 항상 제각(모든 부처님)을 생각하여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것이니라. 넷째는 원식이니 행주좌와에 항상 착한 원을 구하는 것이니라. 다섯째는 해탈식이니 마음이 항상 청정하여 세상 티끌에 물들지 아니함에 이름이 재식이라 하느니라.
또 밥을 끊는 것은 무명과 악업의 식을 끊는 것이니라. 미혹한 사람들은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방탕유일하여 모든 악업을 지으며 정욕을 마음껏 탐착하여 참괴심을 내지 아니하고 오직 먹는 밥을 끊는 것으로 스스로 재를 가짐을 삼는 것이니라. 어찌 어린아이가 썩어 흐늘흐늘한 송장을 보고 목숨이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반드시 옳지 못하니라.
또 예배라는 것은 항상 법답게 하는 것이니라. 이체理體는 안으로 밝고 사상事相은 밖으로 변한다. 이치는 가히 버리지 못하려니와 사상은 드러나고 감춤이 있다. 이와 같은 뜻을 알면 법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대개 예를 차린다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고, 절한다는 것은 아만을 조복 받는 것이니라. 나의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어두운 마음을 굴복시킬 때에 이름을 예배한다는 것이니라. 공경을 행하기 때문에 아만이 끊어진 것이니라. 감히 훼상毁傷하지 못하고, 어두운 마음을 굴복시켰기 때문에 방탕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능히 악한 뜻을 길이 멸하고 착한 생각이 항상 있으면 비록 형상을 나타내어 공경하지 아니해도 항상 예배하는 것이니라. 그렇지만 사상의 법이 밖으로 쓰이면 나타나고, 안으로 버린다면 감추어진 것이니라. 밖으로 공경하는 것을 들어 안으로 진성을 밝히는 것은 성품과 외상이 서로 응함을 표시한 것이니라. 만일 다시 외상으로 예배하는 것만 집착한다면 안으로는 곧 탐진치를 놓아 항상 악념을 행하고 밖으로는 공연히 몸에 모양을 나타내어 거짓 예경을 짓는 것이니라. 어찌 진실로 예배라고 하겠는가. 어진 이를 속이고 성인을 속인 것이니라. 반드시 생사에 윤회하여 악도에 떨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또 묻길, “『온실경』에 이르시길, ‘중사衆士(여러 보살)를 목욕시키면 복을 얻는 것이 한량이 없다’고 하셨는데 오직 마음만 본다면 가히 서로 상응하겠습니까?” 달마 대답하길, “중정사를 세욕하는 것은 세간 유위사가 아니라 이것은 세간에 모든 일을 가자하여 진종眞宗에 비유하신 것이니라. 가만히 일곱 가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첫째는 청정한 물이요, 둘째는 불을 피우는 것이요, 셋째는 비누요, 넷째는 버드나무 가지요, 다섯째는 깨끗한 재요, 여섯째는 젖과 기름이요, 일곱째는 속옷이니라. 이 일곱 가지 법을 써서 목욕을 장엄하면 능히 삼독의 무명과 더러운 때를 제거하는 것이니라. 그 일곱 가지 법은, 첫째는 법계法戒이니 그릇된 허물을 따뜻이 씻는 것이 마치 깨끗한 물과 같아서 모든 진구를 씻는 것이니라. 둘째는 지혜이니 안과 밖을 보아 살피는 것이 불을 피우는 것과 같아서 능히 깨끗한 물을 따뜻이 하느니라. 셋째는 분별이니 모든 악을 가려서 버리는 것이 비누와 같아서 능히 더러운 때를 깨끗이 하는 것이니라. 넷째는 진실한 것이니 모든 망어를 끊는 것이 버들가지와 같아서 능히 구취를 녹이느니라. 다섯째는 정신正信이니 뜻을 결단하여 사려가 없는 것이 깨끗한 재로 몸을 씻는 것과 같아서 능히 모든 바람을 제거하느니라. 여섯째는 조식이니 모든 강강한 것을 조복 받는 것이 젖과 기름 같아서 통틀어 피부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니라. 일곱째는 참괴이니 모든 악업을 뉘우치는 것이 속옷과 같아서 더러운 얼굴을 가리느니라. 이 일곱 가지가 경중의 비밀장이기에 지금의 사람이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
그 따뜻한 집은 곧 몸에 비유한 것이니라. 지혜의 불로써 깨끗한 계탕을 따뜻이 하여 몸 가운데 진여각성을 목욕하되 일곱 가지 법을 가짐으로써 장엄하느니라. 각의 당시에 정사들은 총명하고 지혜가 날카로워 다 성인의 뜻을 깨달아 말씀과 같이 수행함에 공덕을 성취하여 한 가지 성과聖果에 올랐거니와 금시 중생은 우치둔근愚癡鈍根이니라. 이것을 측량치 못하고 세간에 몸을 가져 둔탁한 몸을 씻음으로 각의 교칙을 의지한다고 말하니, 어찌 그릇되지 아니하겠는가. 또 진여각성眞如覺性이 범상한 사람의 형용이 아니라 번뇌진구가 본래 없는데, 어찌 물을 가져 몸을 씻는 것으로 성도하겠는가. 일이 상응치 못하니, 어찌 도를 깨쳤다고 하겠는가. 항상 이 몸이 음욕을 인하여 부정不淨으로 나느니라.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동일하게 가득하여 내외에 충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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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洗此身하야 求於淨者는 猶如洗泥에 終無得淨이니 如此驗之면 明知外洗가 非覺說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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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몸을 씻어 깨끗하기를 구하는 자는 마치 진흙을 씻음에 마침내 깨끗함을 얻지 못함과 같으니, 이와 같이 그것을 증험하면 밝게 밖으로 몸을 씻는 것이 각의 설이 아님을 알 것이니라.”
달마께서 혜가의 물음에 대답하시길, “대저 염각하는 것은 마땅히 정념을 닦느니라. 분명한 뜻으로 바름(정다움)을 삼고 분명치 못한 뜻으로 삿된 것을 삼느니라. 정념은 반드시 참다운 즐거움(진락)을 얻을 것이거니와 사념으로 어찌 저 열반의 언덕을 달려가겠는가. 각자는 몸과 마음을 살펴 하여금 악한 것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느니라. 염자는 생각하는 것이니 계행을 생각하면서 가져서 정밀하게 나아가며 부지런히 하는 것을 잃지 아니하느니라. 이와 같은 뜻을 요해하면 이름이 정념이니, 그러므로 생각이 마음에 머물고, 말에 있지 아니한 것을 아느니라.
통발을 인하여 고기를 구함에 고기를 얻었거든 통발은 잊느니라. 말을 인하여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느니라. 이미 염각하는 이름을 일컬음에 모름지기 염각하는 마음의 본체를 행하느니라. 만일 실다운 체體가 없고 입으로만 공연히 성호만 외우고 마음이 제대로 나가서 온갖 분별을 다하지 않으면 한갓 헛된 공력만 들이느니라. 무슨 이익을 이루겠는가. 또 외우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이름과 뜻이 현저히 다른 것이니라. 입에 있으면 외우는 것이요, 마음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생각은 마음으로 좇아 일어나느니라. 이름이 깨쳐서 행하는 문이 되는 것이요, 외우는 것은 입에 있는 것이니라. 곧 이 소리하는 양태이니 형상에 집착하여 복을 구하는 것은 마침내 옳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길, “무릇 형상 있는 것이 다 허망하다.”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音聲으로 나를 구하려고 하면 이 사람이 사도를 행하느니라. 능히 대각을 보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이것으로써 본다면 이에 사상으로 각을 찾는 것은 진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알라. 과거 모든 성현의 닦은바 공덕이 다 마음의 형상에 말이 아니라 오직 다만 마음을 의논함이니라. 마음은 무릇 성인의 근원이요, 만악의 주인이 되느니라.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어 떳떳이 즐거운 낙이 자심을 말미암아 나느니라. 삼계에 윤회하는 것이 또한 마음으로 좇아 일어나느니라. 마음은 세간을 벗어나는 문호요, 마음은 이 해탈하는 관진關津이니라.관진은 관을 뚫어 나가는 기관에 요긴한 곳이니라. 문호를 아는 자는 어찌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며 관진을 아는 자가 어찌 저 언덕에 도달치 못할까 근심하겠는가.
가만히 금시에 천식들을 보니, 오직 명상을 세워 공을 삼을 줄만 알아 널리 재보를 허비하며 많이 물과 육지에 있는 것을 손상하여 망령되이 각상과 탑을 경영하며, 헛되이 사람의 공력을 들여서 나무를 쌓아서 각탑을 조성하거나 진흙을 발라서 각탑을 조성하며 혹 단청도 바르며 채색으로 각상을 그리되, 마음을 기울이며 힘을 다하여 나의 몸도 손상하게 하며 다른 사람의 정신도 미혹케 하나니, 참괴함을 알지 못한지라 어찌 일찍이 깨치겠는가. 세상에 유위법을 보면 부지런히 애착하고 명상 없는 천진본연성품을 말하면 나무둥치와 같이 우뚝하여 미혹함과 같으니라. 또한 세상에 조그마한 적은 낙을 탐하여 당래에 큰 고 됨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이 닦으며 배우는 것은 한갓 스스로 피곤하고 괴로울 뿐이니라. 올바른(정다운) 것은 등지고 삿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서 광혹한 말로 복을 얻는다고 하느니라.
다만 능히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반조하여 깨쳐 보는 것이 항상 밝게 해야 하느니라. 삼독의 마음이 끊어져서 길이 녹아 없어지게 하며 여섯 도적의 문을 닫아 침노하여 요란치 못하게 하면 항하사 공덕과 갖가지 장엄과 한량없는 법문을 낱낱이 성취하느니라. 범부에서 뛰쳐나와 성현을 증득하는 것이 눈 한 번 깜짝할 사이니라. 도를 깨치는 것이 잠깐 사이에 있거니, 어찌 머리가 희도록 번거로이 닦겠는가. 참된 법문이 깊고 비밀하기에 어찌 갖추어 말하겠는가. 간략히 마음보는 것을 말하여 그 조금(약간) 자상케 하였느니라.
삼계가 몹시 뜨거워 열뇌한 것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그곳에 오래 머물러 차마 한량이 없는 장시간 고(長時間苦)를 달게 받겠는가. 삼계 불집에 윤회하는 것을 면하고자 한다면 깨친 것을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깨친 것을 구하고자 한다면 깨친 것이 곧 마음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 찾겠는가. 몸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몸은 이 거짓 것이라, 사는 것이 있고 죽는 것이 있거니와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변하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고로 임제 말씀하시길, 사람이 죽음에 일백 뼈는 문드러지고 헐어짐에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거니와 나의 본연本然한 성품 이 한 물건은 신령해서 하늘도 덮고 땅도 덮었다 하시니,
슬프다. 지금의 사람이여! 마음을 미혹하여 온 것이 오래되었느니라. 자기의 마음이 진각(불)인 것을 알지 못하며 자기의 자성이 진법인 것을 알지 못하고 법을 구하고자 하면 멀리 모든 성인에게 미루며 각(불)을 구하고자 하면 자기의 마음을 보지 아니하나니, 만일 말하자면 마음 밖에 각(불)이 따로 있고 성품 밖에 법이 따로 있다고 하여 굳게 이 뜻을 집착하여 각(불)의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비록 티끌 수와 같은 겁을 지내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불사르며 뼈를 으깨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을 쓰며 장좌하여 눕지 아니하고 날마다 한 번씩 먹으며 모든 성경(일대장교)을 읽으며 가지가지 괴로이 행함이 모래를 쪄서 밥 짓는 것과 같아서 다만 저만 번뇌로울 따름이니라.
다만48)
제 마음만 알면 항하강 모래 수와 같은 법문과 한량없는 미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얻느니라. 그러므로 각(세존)께서 말씀하시길, 일체중생을 보니 낱낱이 각(불)의 지혜와 만덕상이 갖추어 있다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일체중생의 가지가지 환화가 다 본연한 성품의 대원각(여래) 청정묘심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하시니, 이것을 알겠다. 이 마음을 떠나고는 각(불)을 가히 이루지 못하느니라. 과거의 모든 각(부처)도 다만 마음 밝힌 사람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도 또한 마음 닦는 사람이며 미래에 수학할 사람도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의지하느니라. 원컨대 모든 도 닦을 사람은 간절히 마음 밖에 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심성은 더러움이 없어 본래 스스로 뚜렷이 이루었으니, 다만 망령된 것만 여의면 곧 여여한 각(부처)이니라.
묻길, “만일 각성이 몸에 번듯이 있다고 말하자면 이미 몸 가운데 있습니다. 범부를 떠나지 아니한 것이니 무슨 허물로 인하여 내가 이제 각성(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나를 위하여 분명히 뜻을 해석하시어 다 하여금 마음을 열어서 깨치게 하옵소서!” 대답하시길, “너의 몸 가운데 있건만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느니라. 네가 열두 시 가운데 배 주린 줄 알고 목마른 줄 알며 추운 줄 알고 더운 줄 알며 혹 진심 내고 혹 기꺼워하는 것이 마침내 이 무슨 물건인가? 또한 몸은 지수화풍 네 가지 인연으로 모아서 되느니라. 그 바탕이 완악하게 무정한 것이다. 어찌 능히 보고 듣고 깨치고 알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깨치고 아는 것은 반드시 너의 각성(불성)이니라. 그러므로 임제 말씀하시길, 사대는 법을 말하며 법을 들을 줄을 알지 못하고, 허공이 법을 말하고 법을 들을 줄을 알지 못하느니라. 단지 너의 목전에 역력히 홀로 밝아 눈도 귀도 코도 없어 형단이 없는 놈이 비로소 법을 말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하셨느니라. 이른바 형단이 없는 자는 모든 각(부처님)의 법인法印이며 또한 너의 본래 마음이니라.”
곧 각성이 너의 몸에 버젓이 있다. 어찌 밖으로 구하겠는가. 네가 만일 믿지 아니한다면 간략히 옛 성인의 도에 들어가는 인연을 들어 너로 하여금 의심을 제거하게 하겠다. 너는 모름지기 자세히 믿어야 하느니라. 옛적에 이견왕이 바라제존자에게 묻길, “무엇이 이 각입니까?” 존자 말하길, “성품 보는 것이 이 각입니다.” 왕이 말하길, “스님께서 성품을 보십니까?” 존자 말하길, “내가 각성을 봅니다.” 왕이 말하길, “각성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존자 말하길, “각성이 작용作用하는 데 있습니다.” 왕이 말하길,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기에 내가 이제 보지 못합니까?” 존자 말하길, “이제 버젓이 작용하지만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하십니다.” 왕이 말하길, “나에게도 있습니까?” 존자 말하길, “왕이 만일 작용한다면 이것이 아님이 없고, 왕이 만일 쓰지 아니한다면 그 체體를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말하길, “만일 정당하게 쓸 때는 몇 군데에서 나타납니까?” 존자 말하길, “나타날 때는 마땅히 그 여덟 곳이 있습니다.” 왕이 말하길, “그 여덟 군데로 나타나는 것을 마땅히 나를 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존자 말하길, “부모의 태에 있을 때는 몸이라 하고, 세상에 처해서는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어서는 보는 것이요, 귀에 있어서는 듣는 것이요, 코에 있어서는 향을 가리는 것이요, 혀에 있어서는 말하는 것이요, 손에 있어서는 잡는 것이요, 발에 있어서는 운전하여 다니는 것이니, 두루 나타나면 한 가지 모래 수와 같은 세계를 꾸리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으니, 아는 자는 이것이 각성인 줄로 알고, 모르는 자는 정신 혼백이라고 합니다.” 왕이 듣고 마음이 곧 열리어 깨쳤다. 또 어떤 사람이 귀종 정사에게 묻길, “어떤 것이 이 각입니까?” 귀종이 말씀하시길, “내가 너에게 말하지만 아마 너는 믿지 않을 것이다.” 또 묻길, “정사(보살)의 정성스런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곧 각이다.” 그 사람이 묻길, “어떻게 보임합니까?” 스님이 말씀하시길, “가린 것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사람이 말하자마자 깨쳤다. 내가 위로부터 오며 옛 성인의 도에 들어감에 인연이 명백하고 간략히 쉬어서 힘 더는 것이 방해하지 아니하니, 이 공안을 인하여 믿어 아는 곳이 있으면 곧 옛 성인과 손잡고 함께 갈 것이니라.
대답하길, “너는 응당 가벼이 망령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사와 정을 분명히 나누지 못하면 이것이 미혹하여 전도된 사람이니라. 금시에 도 배우는 사람이 입으로는 진리眞理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퇴굴심을 내어 도리어 나누는 실수가 없다고 하는데 떨어진 것이 다 너의 의심한 바와 같으니, 도를 배우되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자성을 말하되 근본과 끝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이 이름이 사견이요, 닦고 배우는 것이라고 이름하지 못할지니, 오직 저만 그릇된 것이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까지도 그르치는 것이니 가히 삼가지 아니하지 않겠는가.
대저 도에 들어감에 문호가 많으나 요긴한 것을 말한다면 몰록 깨치는 문과 점점 닦는 문의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아니하니라. 비록 말하길, 몰록 깨치고 몰록 닦는 이것은 최상근기에 들어가느니라. 만일 과거를 미루어 생각하여 보건대 이미 여러 생을 드나들면서 자성을 깨친 것을 의지하여 닦아 점점 훈습하여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법을 듣는 그 자리에서 곧 깨쳐 한 때에 몰록 일을 마친다. 참되게 의논하여 본다면 먼저 깨치고 뒤에 깨친 것을 의지하여 닦는 기틀이니라. 이 몰록 깨치고 점점 닦는 두 가지 문은 일천 성인의 법 수레바퀴다. 곧 위로 좇아오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으며 또 닦는 것을 의지하여 이에 증득하지 아니함이 없다. 신통변화는 본래 깨친 것을 의지하여 닦아 옴에 점점 훈습하는 데서 신통변화가 나타나느니라. 깨칠 때에 곧 신통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라.
경에 말씀하시길, ‘이치는 곧 몰록 깨친다. 깨침을 탑승함과 아울러 녹이려니와 사상은 몰록 제하지 못할 것이니라. 차제를 인하여 다한다’ 하시며, 또 규봉이 깊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뜻을 밝혀 말하길, ‘얼음 못이 온전히 물인 줄을 알았지만 양기를 가자하여 써서 무르녹이고 범부가 곧 각인 줄로 깨쳤지만 법력을 자뢰하여 훈습하여 닦을 것이니라.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 윤택하여 바야흐로 물건을 세탁하는 공력이 있고, 망상이 다한다면 마음이 신령하게 소통하여 마땅히 신통광명을 임의로 쓰는 것이 나타난다’고 하니, 이것을 알겠다. 사상事上의 신통변화는 하룻날에 능히 이룰 것이 아니라 점점 오래 닦아 훈습한 힘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니라. 사상의 신통은 달인분상達人分上에 앉아 보면 오히려 요망하고 괴상한 일이며, 또한 성인의 제일 끄트머리의 일이니라. 비록 나타나더라도 요긴히 쓰지 아니하거든 금시에 미혹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길, 한 생각 깨칠 때에 곧 한량없는 신통변화가 나타난다고 하니라. 이것이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지 못한 것이며, 근본과 끝을 논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모난 나무를 가져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이니라. 어찌 크게 어기지 아니하겠는가.”
묻길, “깨침이 이미 몰록 깨쳤다면 어찌 차례로 닦는 것을 가자하며, 닦는 것이 차례로 닦는 것이라면 어찌 몰록 깨치는 것을 말하겠습니까. 이 두 가지 뜻을 다시 말씀하여 나머지 의심을 끊게 해 주십시오!” 대답하길, “범부들은 미혹할 때에 지수화풍 사대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음에, 자기의 자성이 참 법신인 줄을 알지 못하여 자기의 영지가 진각인 줄을 알지 못하고, 마음 밖에 각을 찾아 물결과 물결을 좇아 허랑하게 따라 달아나다가, 홀연히 선각자께서 들어갈 길을 자세히 가르쳐 보임을 입어 한 생각 지혜광명을 돌이켜 나의 본성을 봄에, 이 자성의 경지에는 원래로 번뇌가 없고 생멸이 없는 지혜가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제각(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터럭 끝도 다르지 아니하기 때문에 몰록 깨친다고 하니라.
점차로 점점 닦는 것은 비록 본 자성이 각과 다름이 없으나 시작도 없는 무량겁으로 오며 익힌 습기를 돌연히 몰록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깨친 자성을 의지하여 닦아서 점점 훈습하여 공을 이루어 오래 성인의 태를 기르되 오래오래 하여야 성인을 성취하는 연고로 점수라 하니라. 비교하건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태어나는 날에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모든 뿌리가 다 구족하여 큰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 힘이 충실치 못하니, 자못 세월을 많이 지내야 바야흐로 대인을 이루느니라.”
묻길, “무슨 방편을 지어서 한 생각에 기틀을 돌이켜서 문득 자성을 깨칩니까?” 대답하길, “다만 너의 자심으로 다시 무슨 방편을 짓고자 하는가? 만일 방편을 지어 다시 알기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제 눈을 보지 못하면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눈을 보고자 구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미 제 눈이라면 어찌 다시 보려고 하겠는가. 만일 자기에게 본래 있어 잃지 아니한 것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이 보는 것이니라. 다시 보기를 구하는 마음도 없는데 어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 영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미 제 마음을 어찌 다시 알기를 구하겠는가. 알기를 구하고자 한다면 문득 아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할 줄을 알면 곧 이 견성이니라.”이것은 아는 것으로도 알지 못하고 모르는 것으로도 알지 못하나니 다만 알고 모른 것으로 알지 못할 줄을 알면 곧 견성이라 하는 말
묻길, “근기가 높은 사람은 들으면 곧 쉽게 알려니와 중하근기는 의혹이 없지 아니하니, 다시 방편을 말하시어 미한 자로 하여금 깨쳐 들어가게 하소서!” 대답하길, “도는 알고 알지 못하는 데 속한 것이 아니니라. 네가 한 마음을 가져 깨치기를 기다린 마음을 제거하여 버리고 나의 말을 들어라. 모든 법이 꿈 같으며 환화 같으니, 그러므로 망령된 생각이 본래 고요하고 티끌 경계가 본래 공한 것이니라.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영지가 어둡지 아니하니, 곧 비어 고요하고 신령하여 아는 마음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이 삼세 모든 각과 역대歷代 조사와 천하 선각자의 은밀히 서로 전하신 법인이니라. 만일 이 마음을 깨치면 참 이른바 계제階梯를 밟지 아니하고 바로 각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이 삼계에 뛰어나며, 나의 천진으로 있는 본분 고향에 돌아가 몰록 의심이 끊어진 것이니라. 문득 인천으로 더불어 스승이 되어 중생의 고행에 빠진 것을 슬퍼하는 것과 지혜가 서로 도와 나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구족하여 능히 인천에 미묘한 공양 받음을 감당함에 날로 만량황금을 녹일 것이니, 네가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참 대장부라 일생에 능사能事를 이미 마칠 것이니라.”
묻길, “나의 분상을 의거하건대 어떤 것이 이 비어 고요하고 신령하게 아는 마음입니까?” 답하길, “네가 이제 내게 묻는 것이 네가 비어 고요하고 신령하게 아는 마음인데, 어찌 반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밖으로 찾는가? 내가 이제 너의 분상을 의거하여 바로 본마음을 가리켜 너로 하여금 깨치게 하겠노라. 네가 마음을 깨끗이 하여 나의 말을 들어라. 아침부터 날이 저물기까지 열두 시 가운데에 혹 보고 들으며 혹 웃고 말하며 혹 진심 내고 즐거우며 혹 시비하여 가지가지 베풀며 운전하나니, 또한 일러라. 필경에 이 누가 능히 이렇듯이 운전시위 하는가?
만일 색신이 운전한다고 말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어떤 사람이 한 생각 사이에 명을 마침에 모두 아직 흐늘흐늘 썩어 무너지지 아니하였는데, 눈이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귀로 능히 듣지 못하며 코가 향냄새를 분별하지 못하고 혀가 담론하지 못하며 몸이 운동하지 못하고 손이 잡지 못하며 발이 달아나지 못하는가. 이것은 능히 보고 듣는 동작이 반드시 너의 본마음이 그런 것임을 알 것이니라. 이것은 너의 몸이 그런 것이 아니니라. 하물며 이 색신은 지수화풍 사대의 성질이 허망하여 마치 거울 가운데 영상 같으며, 또한 마치 물 가운데 비추어 나타난 달과 같으니라. 그 몸이 어찌 능히 요요了了히 항상 알며 명명明明히 어둡지 아니하여 느껴서 드디어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묘용妙用을 통하겠는가. 그러므로 말씀하길, 신통과 아울러 묘용이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라고 하니라.”
또한 이성에 들어가는 길이 갈래가 많으니, 너에게 한 문으로 들어가는 길만 가리켜 너로 하여금 본원으로 돌아가게 하겠노라. 네가 도리어 까마귀가 울고 까치가 지절거리는 소리를 듣는가. 말하길, “듣습니다.” 말하길, “네가 도리어 너의 듣는 성품에 허다한 소리가 있음을 듣는가.” 말하길, “이 속에 이르러서는 일체 소리와 일체 분별을 함께 얻지 못합니다.” 말하길, “기특하고 기특하다. 이것은 이 관음께서 자성에 들어가신 문이니라. 내가 다시 네게 묻는다.” 네가 말하길, “이 속에 이르러서는 일체 소리와 일체 분별을 다 가히 얻지 못한다고 하니, 이미 가히 얻지 못한다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 허공인가? 이 허공이 아닌가?” 말하길, “원래로 공하지 아니하여 밝고 밝아 어둡지 아니합니다.” 말하길, “어떤 것이 이 비지 아니한 체體가 되는가?” 말하길, “또한 상모가 없으니, 말로 가히 미치지 못합니다.”
말하길, “이것이 제각제조(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의 수명壽命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미 상모相貌가 없다면 도리어 대소가 있는가. 이미 대소가 없다면 도리어 갓과 지경이 있는가. 갓과 지경이 없기 때문에 내외가 없고, 내외가 없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것이 없고, 원근이 없기 때문에 피차가 없느니라. 피차가 없기 때문에 왕래가 없고, 왕래가 없으면 생사가 없고, 생사가 없으면 고금이 없고, 고금이 없으면 미혹하고 깨친 것이 없고, 미혹하고 깨친 것이 없으면 범부와 성현이 없고, 범성이 없으면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고,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으면 시비가 없고, 시비가 없으면 일체 이름과 말이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이미 모두 이와 같다면 일체 근경根境과 일체 망념과 나아가 가지가지 상모와 가지가지 명언名言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이것이 어찌 본래 공적한 것이 아니며, 본래 물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영지가 어둡지 아니하여 무정과 같지 아니하여 자성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나니, 이것이 너의 공적영지에 청정심체이니라.
그래서 이 청정하여 비고 요요한 마음이 삼세제각(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승정명심수승하여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라.이며, 또한 중생의 본원각성이니라. 이것을 깨쳐서 지키는 자는 한결같이 앉아서 동함이 없어 해탈하고 이것을 미혹하여 등지는 자는 육취에 가서 길이 겁에 윤회하느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길, 일심을 미혹하여 육취에 가는 자는 마음이 경계를 따라가는 것이며 동하는 것이다. 법계를 깨쳐 일심으로 회복하는 자는 오는 것이며거래가 없는 본분고행에 온 것이라. 고요한 것이라고 하느니라. 비록 미혹하고 깨치는 것은 있을지라도 본래 근원은 하나이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법이라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라 하시니,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에 있어 더하지 아니하고 범부에 있어 감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말씀하시되, 성인의 지혜에 있어 빛나지 아니하며 범부의 마음에 숨었으나 어둡지 아니하다고 하느니라. 이미 성인에 있어 더하지 아니하며 범부에 있어 적지 아니하다면 각조(부처님과 조사)가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그런 까닭에 사람에게 있어서 다름은 능히 마음에 생각을 잘 두호해야 하느니라.
네가 만일 믿음을 얻으면 의정을 몰록 쉬리니, 장부의 뜻을 내며 진정한 소견을 발하여 친히 그 맛을 보아 스스로 즐거워하는 경지에 이를 것이니라. 곧 이것이 마음 닦는 사람의 깨치는 곳이니라. 다시 계급 차제가 없기 때문에 돈오라고 하느니라. 저 이르길, 믿는 가운데 제각(모든 부처님)의 과덕에 계합하여 터럭만큼도 다르지 않아야 바야흐로 믿음을 이룬다고 하느니라.”
묻길, “이미 이 자성을 깨쳐 다시 계급이 없다면 어찌 뒤에 닦는 것을 가자하여 점점 훈습하여 점점 이룹니까?” 대답하길, “깨친 후에 점점 닦는 뜻을 앞에 이미 갖추어 말하였거니와 다시 의정을 놓지 못하였기에 거듭 말함을 방해하지 아니하느니라. 네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을지니라. 범부가 무시광대겁으로 좇아오므로 오늘날까지 이르러 오도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상에 굴러다니면서 나서 왔다가 죽어 갔다가 함에, 나라는 것을 굳게 집착하여 망상으로 전도하는 것과 무명에 익힌 습기로 오래 습성을 이루었기에, 비록 금생에 이르러 몰록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각(부처님)과 같음을 깨쳤으나 구습을 갑자기 제거하여 끊기 어렵기 때문에, 역순경계를 만나면 성냄과 기쁨과 시비심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멸하며 객진번뇌가 전과 다름없느니라. 만일 반야지혜로써 공력을 더하여 힘을 두지 아니하면, 어찌 능히 무명을 대치하여 크게 쉬고 크게 쉬는 땅에 이르겠는가.
저 말했던 것처럼, 몰록 깨친 것이 비록 각과 같으나 다생에 습기가 깊어졌다. 바람이 멈추려 해도 물결이 오히려 솟고 자성이 나타나되 망념이 오히려 침노하느니라. 또 대혜 종고께서 말씀하시길, 왕왕왕왕은 무데무데라.에 근기가 날카롭고 총명한 무리들이 힘을 많이 허비치 않고 이 일을 타격해서 발함으로 문득 용이한 마음을 내어 다시 닦아 다스리지 아니하다가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전과 같이 흘러 방랑하여 윤회를 면치 못한다고 하느니라. 어찌 한번 깨친 것으로 문득 뒤에 닦는 것을 쓸어버려 두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후 길이 비추며 항상 살피어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모두 따라 주지 말지니라. 덜고 또 덜어 하염없는 데 이르러야 바야흐로 마치는 것이 되는 것이니라. 천하 선각자의 깨친 후에 소 먹인 행이 이것이니라. 비록 뒤에 닦으나 이미 먼저 망념이 본래 공하며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몰록 깨쳤기에 악을 끊고 끊으나 끊는 것이 없고 선을 닦고 닦으나 닦을 것이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는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시길, 비록 갖춘 만행을 닦을지라도 오직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고 하였느니라.
규봉이 먼저 깨치고 후에 닦는 뜻을 말하길, 몰록 이 자성이 원래 번뇌가 없으며 새는 것이 없는 지혜의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깨치어 각(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느니라. 이것을 의지해서 닦는 자는 이 이름이 최상승선이며, 또한 이름이 대각(여래)의 청정선이니라. 만일 능히 생각생각을 닦아 익히면 자연히 점점 백천삼매를 얻을 것이니라. 달마의 문하에 전전이 서로 전하는 자가 이 선이라 하였느니라. 몰록 깨치고 점점 닦아 익히는 뜻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만 빠뜨려도 옳지 못하느니라.
혹자들은 선악의 자성이 공함을 알지 못하고 굳건히 앉아 요동하지 아니하여 몸과 마음을 억지로 누르는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누르는 것처럼 마음 닦는 것을 삼으니, 이것은 크게 미혹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길, 성문들은 마음으로 마음의 미혹을 끊되 능히 끊는 마음이 이 도적이라고 하나니, 그러할 것이 아니라 다만 자세히 살생과 도적과 음탕함과 거짓말이 자성을 좇아 일어난 것으로 보면 일어난 것이 곧 일어난 것이 없느니라. 당처가 문득 고요하나니 어찌 다시 끊기를 구하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서워 말고 오직 깨치기가 더딜까 무서워하라고 하였으며, 또 말씀하시길,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칠지니 깨치면 곧 없다고 하였느니라. 그런 까닭에 깨친 사람의 분상에는 비록 객진번뇌가 있으나 한 가지 제호를 이루느니라. 다만 미혹이 본래 없는 것을 비추면 공화삼매가 바람에 연기가 걷히는 것과 같고, 환화육진이 끓는 물에 얼음 녹는 것과 같느니라.
만일 능히 이와 같이 생각생각을 수습해서 본래 면목을53)
비추어 돌아보기를 잃지 아니하여 선정(일정한 것)과 지혜를 균등히 가지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자연히 담박하여지며, 육도의 사생이 고통을 받는 것을54)
슬퍼하며, 또 큰 지혜가 점점 더 밝아지며(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증장하고 밝아지며) 죄업이 자연히 끊어지고 공력의 수행이 자연히 증진하나니, 번뇌가 다할 때에 생사가 곧 끊어지느니라. 만일 미세하게 흘러 간단없이 요동하는 미혹이55)
아주 끊어지고 뚜렷이 깨친 큰 지혜가 밝게 홀로 있으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국토 중에 중생의 마음으로56)
감당함을 따라 기틀에 상응하느니라. 마치 밝은 달이 구만리장천에 나타남에 그림자가 일만 물에 나누어 비추는 것과 같아서, 쓰는 것이 상응하여 다함이 없어 인연이 있는 중생을 건지는 데 쾌락하여 근심이 없어서, 그를 불러서 대각의 성존(세존)이라 하느니라.”
제14절 정시이문정혜正示二門定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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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後修門中에 定慧等持之義를 實未明了하오니 更爲宣說하사 委示開迷引入解脫之門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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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길, “위에 닦는 문 가운데에 정혜정이라 하는 것은 요동치 아니하고 고요히 그쳐 안정한 것이요, 혜라 하는 것은 지혜가 밝은 것이라.를 균등히 가지는 뜻이 실로 명료치 못하오니, 다시 위하여 말씀하시어 자세히 미혹한 사람을 열어 보이시어 해탈문에 들어가게 하소서!”
대답하길, “만일 법의 뜻을 베푼다면 자성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그 실제는 정定과 혜慧 두 가지뿐이니라. 그 강요綱要를 취한다면 다만 자성 위의 체와 용 두 가지뿐이니라. 앞에서 말했던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이것이니라. 정定은 체體가 되고 혜慧는 용用이 되는 것이니, 체體에 나가서 곧 용用이 있기 때문에 혜가 정을 떠나지 아니하고, 용에 나아가 체가 있기 때문에 혜를 떠나지 아니하고, 정이 곧 혜이기 때문에 고요히 항상 알고, 혜가 곧 정이기 때문에 알지만 항상 고요하니라. 조계산 육조 성사께서 말씀하시길, 심지心地가 어지럽지 아니한 것이 자성정自性定이요, 심지가 어리석지 아니한 것이 자성혜自性慧라고 하셨느니라. 만일 이와 같음을 깨치어 공적영지空寂靈知를 임의로 운전하여 맑고 비추는 것이 둘이 없으면 이것이 돈오문頓悟門에 쌍으로 정혜를 닦는 것이니라.
만일 말하길, 먼저 고요하고 고요한 것으로 모든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린 후에 또렷하고 또렷한 것으로써 혼침에 머묾을 다스려, 선후를 대치對治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조복 받아 고요한 데 들어가는 자는, 이것이 점수문중漸修門中에 하열한 근기가 수행하는 것이니라. 비록 또렷하고 고요함을 균등히 가진다 할지라도 아직 지극히 고요한 것을 탐착하여 수행하는 것을 삼음을 면하지 못하나니, 어찌 생사 대사를 마친 사람의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아는 것을 떠나지 아니하여 정과 혜를 쌍雙으로 닦는 자가 되겠는가. 조계산 육조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깨쳐 닦는 것은 다투는 데 있지 아니하나니, 만일 선후를 다툼이 있으면 곧 이 미혹한 사람이라 하셨느니라.
곧 통달한 사람의 분상에 정과 혜를 균등히 가지는 뜻은 공용功用에 떨어지지 아니하니라. 원래로 함이 없음으로부터 다시 특별한 경지와 시절이 없느니라. 형색을 볼 때와 소리를 들을 때에도 다만 이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에도 다만 이러하며, 똥 누고 오줌 눌 때에도 다만 이러하고, 사람을 대하여 말할 때에도 다만 이러하며, 내지 행주좌와에 혹 말하며 혹 잠잠하여 혹 기뻐하며 혹 성내는 데 이르러 일체 때 가운데 낱낱이 이와 같이 하되, 빈 배를 물의 풍랑에 둥둥 띄움에 높은 데는 배도 높이 뜨고 낮은 데는 배도 나직이 뜨는 것과 같느니라. 또 물이 산에 굴러 흐름에 구부러진 것을 만나며 곧은 것을 만나는 것과 같아서 마음마음이 분별하는 알음알이가 없느니라. 오늘날도 등등(흥뚱흥뚱)하게 임의로 운전하며 명일에도 등등(흥뚱흥뚱)하게 임의로 운전하느니라. 모든 인연을 수순하되 장애 없어 저 선과 악을 끊지도 아니하며, 닦지도 아니하며 바탕이 꿋꿋하여 보고 듣는 데에 심상하느니라. 곧 한 티끌도 대대 짓는 것이 끊어졌거니, 어찌 다 망념을 보내어 없애 버리려는 공력을 수고로이 하겠는가. 한 생각도 망정을 내지 아니하느니라. 망령되이 허망한 반연을 제거하여 버리려는 힘을 가자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장애가 무르녹고 습기가 무거워 관력觀力이 적고 부심浮心이 많아, 어두운 마음의 힘이 크고 지혜의 힘이 적으므로 선악의 경계에 동정이 서로 바뀌어 불이 일어남을 면치 못해서, 마음이 편안하고 맑지 못한 자는 망연妄緣을 보내어 없애려는 공력이 없지 아니하니라. 옛적에 말하길, 육근六根으로부터 경계로 쫓아 나가는 것을 돌이키어 마음이 모든 경계를 쫓지 아니한 것을 정이라고 하고 마음과 경계가 텅 비어 비추는 지혜 거울에 때 낌이 없는 것을 혜라고 하니라. 이것이 비록 수상문 정혜의 점수문 가운데에서 닦아 가는 하열한 근기가 행할 바 망령된 것을 대치하는 것에는 반드시 없지 못하니라. 만일 산란심이 불꽃같이 일어나거든 먼저 정定으로써 자성에 칭합하여 마음이 망령된 반연을 따르지 아니하여 본래 공적함에 계합하고, 만일 자불음(졸음)이 많거든 지혜로써 깨끗이 법이 공함을 관찰觀察하여 비추는 거울이 때가 없어 본래 밝음에 계합하니라. 정으로써 흩어지는 생각을 다스리고 혜로써 흐린 마음을 다스려, 동하고 고요한 것을 서로 잊고 혼침과 산란을 대치하는 공력을 마친 뒤에야, 경계를 대하면 염념이 본 종취로 돌아가고 모든 인연을 만나더라도 마음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정과 혜를 임의로 운전하여 균등히 닦아야 바야흐로 일이 없는 사람이 되느니라. 만일 능히 이와 같이 하면 참으로 정혜를 닦아 밝게 각성을 보느니라.”
묻길, “너의 판단한 바를 의거한다면 깨친 뒤에 닦는 문 가운데에 정과 혜를 균등히 가지는 뜻이 두 가지가 있느니라. 하나는 자성문 정혜라 하고 또 하나는 수상문 정혜니라. 자성문 정혜는 말하자면 본래 공적하고 본래 아는 것을 임의로 운전하여 원래로 함이 없느니라. 한 티끌도 상대자를 짓지 아니하느니라. 어찌 보내어 없애려는 공력을 수고로이 하며 한 생각도 망정을 내지 아니하는 것이겠는가. 망령되이 공력을 허비하는 인연을 가자할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 말하느니라. 이것이 몰록 깨친 문호에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여 정혜를 균등히 가진 것이니라. 수상문 정혜로 말하자면 이성에 꼭 맞아 흐트러진 마음을 거두어 법이 본래 공함을 관찰하되, 혼침과 산란을 고루 조복 받아 함이 없는 데 들어감이라 하여 판단해서 말하느니라. 이것이 점수문 가운데 하열한 기틀이 행하는 것이라 하니, 이 두 정혜문에 나아가 의심이 없지 않느니라.
만일 말하길, 한 사람이 정혜를 수행할 것이라고 한다면, 먼저 자성문을 의지하여 정과 혜 두 가지를 닦은 연후에 다시 수상문에 정혜를 써 대치하는 것이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먼저 수상문을 의지하여 고루 혼침과 산란을 조복 받은 뒤에 자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니라. 만일 먼저 자성문 정혜를 의지한즉 공적영지를 임의로 운전하여 다시 대치할 공력이 없는데, 어찌 다시 수상문 정혜를 취하겠는가. 결백한 옥을 가져 문채를 아로새기어 옥에 윤택한 덕을 손상하는 것과 같느니라. 만일 먼저 수상문 정혜로써 대치하는 공을 이룬 뒤에 자성문으로 나아간다면, 이것은 완전히 점수문 가운데 하열한 근기의 깨치기 전에 차차로 훈습하여 닦는 것이니라. 어찌 몰록 깨친 문에 먼저 깨치고 뒤에 닦아 공 없는 공을 쓰는 것이 되겠는가.
만일 일시에 전후가 없으면 두 문의 정혜와 돈점이 다름이 있으니, 어찌 일시에 같이 행하겠는가. 곧 돈오문에는 자성문을 의지하여 공적영지를57)
임의로 운전하여 공功을 잊는 것이요, 점수문의 하열한 근기는 수상문 정혜에 나아가 대치하는 공력을 수고로이 하느니라. 두 문은 근기와 돈점이 다르고 우열이 분명하니, 어찌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문 가운데에 두 가지를 같이 해석하겠는가?”
대답하길, “해석이 분명한데 네가 의심을 내느니라.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힐난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돈오와 점수 두 문에 나아가 각기 수행하는 것을 판단한다면, 자성문 정혜를 닦는 자는 이것이 돈오문에 공이 없는 공을 닦아 공적영지를 같이 운전하여 스스로 자성을 닦아 각도를 이루느니라.
수상문의 정혜를 수습하는 자는 이것이 아직 깨치기 전에 점수문의 하열한 근기가 대치하는 공력을 써서 마음마음이 미혹을 끊어 고요함을 취하여 행을 삼는 것이니, 이 두 문에 수행하는 돈점이 각기 다르니라. 가히 어지러이 섞지 말지니라. 그러나 깨친 뒤에 수습하는 문중에서 겸하여 수상문 대치를 의논한 자는 온전히 점기漸機의 행한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도를 가자하여 익힘이 다름이니, 어떠한 까닭인가. 이 돈오문에도 또한 근기가 수승한 자 있으며 근기가 하열한 자가 있으니, 가히 일례로 그 행리를 판단치 못하느니라.
만일 번뇌가 담박淡薄하고 신심身心이 경안하여 착한데 착한 것을 여의고 악한데 악한 것을 여의면 팔풍八風에 동요치 아니하여, 삼수三受가 고요한 자는 자성의 정혜를 의지하여 공적영지를60)
임의로 운전하여 같이 닦느니라. 천진天眞하여 지음이 없으며 동정動靜이 항상 선禪이라 자연의 이치를 성취하거니, 어찌 수상문에 대치하는 뜻을 가자하겠는가. 병이 없는 데는 약을 구하지 아니하느니라. 비록 먼저 한목(몰록) 깨쳤으나 번뇌가 두텁게 무르녹고, 습기가 굳고 무거워 경계를 대함에 생각생각이 망정을 내며, 모든 인연을 만남에 마음마음이 상대를 지으며, 저 혼침과 산란에 부림을 입어 공적영지를 매각昧却하여 항상 그런 자는 곧 수상문 정혜를 같이하여 대치對治함을 잊지 아니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조복 받아 함이 없는 데 들어가는 것이 곧 마땅하니라. 비록 대치하는 공부를 가자하여 잠깐 습기를 조복하나 써 먼저 몰록 심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공함을 깨친 연고로 곧 점수문 가운데 하열한 근기의 오염수汚染修에 떨어지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깨치기 전에 닦는 것은 비록 공력을 써서 잃지 아니하여 생각생각이 훈습하여 닦았으나, 착착着着히 의심을 내어 능히 무애하지 못한 한 물건이 가슴 가운데 걸려 있는 것과 같아서 편안치 못한 모양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다가, 일구월심하여 대치하는 공력이 순숙하면 신심객진身心客塵의 흡사하게 경안輕安하듯 하니라. 비록 다시 경안한 듯하나 의근疑根이 끊어지지 못한 것이 마치 풀 누름과 같아서 오히려 생사계에 자재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길, 닦는 것이 깨치기 전에 있어서는 참으로 닦는 것이 아니다. 깨친 사람의 분상에는 비록 대치방편對治方便이 있으나 생각생각이 의심이 없어 더럽히는 데 떨어지지 아니하니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천진묘성天眞妙性에 계합하여 고요하고 아는 것을 임의로 운전하며 생각생각이 일체경계에 반연하되, 마음마음이 길이 모든 번뇌를 끊어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며, 정혜를 균등히 가져 위없는 도를 성취하여 앞에 근기가 수승한 자로 더불어 다시 차별이 없느니라. 곧 수상문 정혜가 비록 이 점기漸機에 행하는 것이지만 깨친 사람의 분상에는 가히 이른바 점철성금點鐵成金이니라. 만일 이와 같음을 알면 어찌 이문二門의 정혜로써 선후차제의 두 소견의 의심이 있겠는가.”
“원컨대 모든 도 닦는 사람은 이 말을 연구하여 맛들이고 다 호의하여 스스로 퇴굴심을 내지 말아야 하니라. 만일 장부의 뜻을 갖추어 무상보리를 구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무엇을 하겠는가. 간절히 글만 집착하지 말고 바로 요의了義를 구하여 낱낱이 자기 성품으로 나아가 본 종지에 계합하면 곧 스승 없는 지혜가 자연히 나타나고 천진의 자성을 요연了然히 매하지 아니하여, 혜신慧身을 성취하되 다른 사람의 깨침을 말미암지 아니해야 하니라. 이 묘한 지취가 비록 모든 사람의 분상이지만 만일 일찍이 반야종지를 심어 대근기가 아니면 능히 생각생각에 정신正信을 내지 못하느니라. 어찌 헛되이 믿지 아니하는가. 또한 비방하여 도리어 무간지옥을 부르는 자들이 비비比比이 있으니, 비록 신수信受치는 아니하나 한번 귀에 지내어 잠시 결연하면 그 공력에 큰 덕을 가히 칭량치 못하느니라. 『유심결』에 이르시길, ‘듣고 믿지 아니하더라도 오히려 각 종자의 인을 맺고, 배워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인천의 복을 덮어 성각成覺할 정인正因을 잃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니,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 이루어 항상 수호하여 잊지 아니한 사람이야 그의 공덕을 어찌 능히 헤아리겠는가.
과거 윤회하던 업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알지 못하는가? 그 몇천 겁이나 흑암지옥에 떨어지며 무간지옥에 들어가 온갖 고를 받았으며, 또 알지 못하는가? 그 얼마나 각도(불도) 구하고자 하여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고 장겁長劫에 윤회에 빠져 어두워 깨치지 못해서 모든 악업을 지었는가. 때에 혹 한번 생각하면 부지불각에 후유에 길이 탄식할 것이니라. 그 가히 방완放緩이 하며 두 번 다시 또 앞의 앙화를 받으려고 하는가? 또 알지 못하는가? 누가 다시 나로 하여금 이제 인생人生을 만나 만물에 신령함이 되어 진을 닦는 길을 매昧하지 않게 하겠는가. 실로 이른바 맹구우목이며눈먼 거북이 나무 만난 것이며 섬개투침이니라.작은 겨자에 바늘 던진 것이라. 그 경쾌하고 다행함을 어찌 수승하게 말하겠는가. 내가 이제 만일 스스로 퇴굴심을 내거나 혹 해태심을 내어 항상 뒤를 바라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으면, 물러가 악취에 떨어져 모든 고통을 받을 때는 비록 일구각법一句覺法을 듣기를 원하여 신해수지信解受持하여 신산辛酸을 면하고자 한들 어찌 가히 얻겠는가. 위태한 데 다다라서는 뉘우쳐도 유익한 바가 없느니라. 원컨대 모든 도 닦는 사람들은 방일심을 내지 말며 탐음을 착하지 말고 머리에 불타는 것을 구안하듯 하여 조고照顧함을 잃지 말아야 하느니라. 무상이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 같고 명은 저녁 빛 같으니라. 금일에 비록 있으나 명일에 안보키 어려우니, 간절히 뜻에 두고 간절히 뜻에 두어야 하느니라.
또한 세간에 함이 있는 선을 의지하여도 또한 가히 삼도고륜三途苦輪을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 수승한 과보를 얻어 모든 쾌락을 받건대 하물며 이 최상심심법문最上甚深法門이겠는가. 잠시 믿음을 내어도 이룬바 공덕을 가히 비유로써 그 소분도 말할 수 없느니라. 저 경에 이르시길, 만일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써 그곳의 세계 중생에게 보시하고 공급하여 다 충만함을 얻게 하며, 또 그곳의 세계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하여금 사과四果를 얻게 하면, 그 공덕이 한량없고 갓이 없으려니와 한 자리에서 밥 먹을 사이에 정正히 이 법을 생각하여 얻는바 공덕만 같지 못하다고 하시니, 이것을 알아야겠다. 나의 이 법문은 가장 높고 가장 존귀하여 저 모든 공덕에 견주어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길, 일념정심一念淨心이 이것이 도량이다. 항하사 칠보의 탑을 짓는 것보다 수승하다. 보탑은 필경에 부수어져 티끌이 되거니와 일념정심은 정각을 이룬다 하시니, 원컨대 모든 도를 닦는 사람은 이 말을 연구하여 맛들이어 간절히 뜻에 둘지어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치 아니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차신此身을 제도하겠는가. 이제 만일 닦지 아니하면 만겁에 어그러지려니와 이제 만일 굳건히 닦으면 닦기가 어려운 행일 지라도 점점 어렵지 아니함을 얻어 공행功行이 스스로 나아가리라. 슬프다. 금시 사람이 주린 데다가 좋은 음식을 만남에 입을 내릴 줄을 알지 못하며 중병에 의왕을 만남에 약을 복용할 줄을 알지 못하느니라. 말하길, 저 어찌할고 저 어찌할고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도 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리라.
또한 세간 유위사는 그 형상을 가히 보며 그 공을 가히 증험함에 사람이 하나의 일을 증득할지라도 그 희유함을 찬탄하거니와, 나의 이 심종은 형상을 가히 볼 수 없으며 상태를 가히 볼 수 없느니라.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하느니라. 천마외도가 훼방하려고 해도 문이 없고 제석과 범천과 모든 천상이 칭찬하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하물며 범부의 천식한 무리가 그 능히 방불케 하겠는가. 슬프다. 우물의 개구리가 어찌 창해의 드넓은 것을 알며 야간(여우)이 어찌 능히 사자의 포효함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말법의 세간 중에 이 법을 듣고 희유한 생각을 내어 신해수지信解受持자는 이미 무량겁 중에 모든 성인을 받들어 섬겨(承事)서 모든 선근을 심어 깊이 반야의 선근을 맺은 최상의 선근임을 알리라. 그러므로 『금강경』에 말씀하시길, 저 이 장구에 능히 신심을 내는 자는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 이미 무량각소에 모든 선근을 심은 것이라고 하시고, 또 이르시길, 대승심을 발한 자를 위하여 설하시며, 최상승을 발한 자를 위하여 설함이라 하시니라.
원컨대 모든 도를 구하는 사람은 겁내어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용맹심을 낼지니라. 숙겁宿劫의 선인을 가히 알지 못하니라. 만일 자기의 수승한 것을 믿지 아니하고 하열한 것을 달게 여기어 간조艱阻한 생각을 내어 이제 닦지 아니한다면, 비록 숙세의 선근이 있을지라도 이제 그것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더욱 그 어려운 데에서 전전히 멀어지리라. 이제 이미 보소寶所에 도달하면 빈손으로 돌아감은 옳지 못하니, 한번 사람의 몸을 잃어버리면 만겁에 회복키 어려우니라. 모름지기 삼가하길 청하노니, 어찌 지혜 있는 자가 그 보소를 알고 도리어 구하지 않고 길이 외롭고 빈한함을 원망하겠는가. 만일 보배를 얻고자 한다면 가죽 주머니를 놓아 버릴지니라.”
삼계가 혼연히 일어나는 것이 동일하게 일심으로 돌아가니, 전각후각(전불후불)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시고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시니라. 묻길, “문자를 세우지 아니한다면 무엇으로써 마음을 삼습니까?” 답하길, “네가 내게 묻는 것이 곧 너의 마음이요, 내가 너에게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다. 무시광겁으로 좇아옴으로써 내지 시위운동이 일체 때 가운데와 일체 처소가 다 이것이 너의 본심이며 다 이것이 너63)
의 본각이니, 즉심시각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이 마음을 제하여 놓고는 마침내 별각을 가히 얻을 수 없으니, 이 마음을 여읜 밖에 도와 원적(영각)을 찾는 것이 옳은 곳이 없느니라. 자성은 진실하여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며 법이 곧 이 마음의 뜻이니, 자심이 이 각도(보리)이며 자심이 이 원명적조(열반)이니라. 만일 마음 밖에 각과 및 도를 가히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니라. ‘마음 밖에 각이 있다’고 한다면 각과 및 도가 다 어느 곳에 있는가.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손으로써 허공을 붙잡으려면 되겠는가? 되지 않겠는가? 허공은 다만 이름만 있고 또한 상모가 없으니, 취하려 해도 어찌 못하고 버리려고 해도 어찌 못하며 이 허공을 붙잡으려 해도 어찌 못하는 것과 같아서 이 마음을 제한 밖에 각을 찾으려면 마침내 가히 옳지 못하니라.
각은 이 자심으로 짓는 것이거니이것은 본각이 아니요 후각을 말한다. 무엇을 인하여 이 마음을 떠난 밖에 각을 찾겠는가. 전각후각이 단지 그 마음만 말씀하시니, 마음이 곧 이 각이요, 각이 곧 이 마음이니, 마음 밖에는 각이 없고, 각 밖에는 마음이 없느니라. 만일 마음 밖에 각이 있다면 어찌 각을 보려는 소견을 일으키는가? 서로서로 광혹狂惑하여 능히 본심을 알지 못하고 저 무정의 물건에 포섭하여짐을 입어무정물은 나무와 돌로 조성한 우상이라. 자유에 분이 없느니라.만일 저 무정물을 각이라고 하면 자기는 얽매여 자유분이 없다. 만일 또한 믿지 아니한다면 스스로 속인 것이라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자심이 이 각임을 안다면 마땅히 마음 밖에 각을 찾지 말지니라. 각은 각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니, 마음을 가져 각을 찾으면 각을 모르느니라. 다만 마음 밖에 형상의 각만 숭상하는 것이니, 다 자심이 각인 줄을 알지 못하느니라. 또한 각을 가져 각에 예하지 말며, 또 마음을 가져 각을 생각하지 말지니라. 각은 경을 외우는 것도 아니며, 각은 계를 가지는 것도 아니며, 각은 계를 범하는 것도 아니며, 각은 가지고 범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선악을 짓는 것도 없느니라.눈이 제 눈 못 보느니라. 만일 각을 찾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견성하여 곧 이것이 각이니라. 만일 견성치 못하면 각을 생각하고 경을 외우고 재를 가지고 계를 가져도 또한 이익이 없느니라. 염각은 인과를 얻고 송경은 총명을 얻으며 지계는 천상에 나아가고 보시는 복보를 얻나니, 각을 찾는 것은 가히 얻지 못할지니라.
만일 자기를 밝게 알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선지자를 참예하여 생사의 근본을 마칠지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곧 이름이 선지자가 아니니라. 비록 십이부경을 설하더라도 또한 생사를 면치 못하여 삼계에 윤회하는 고통을 받아 나올 기약과 때가 없으리라. 옛적에 선성이 있어 십이부경을 외워도 오히려 윤회를 면치 못한 것은 다만 견성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선성도 이미 이와 같거든 지금 사람이 삼오본의 경론을 강의하고 써 각법을 삼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니라. 만일 자심을 알지 못하면 부질없는 문서를 외울지라도 도무지 쓸 곳이 없느니라. 만일 각을 찾길 요구한다면 바로 모름지기 견성하여야 할지니라. 자성이 곧 이 각이다. 각은 곧 이 자재한 사람이며 일없는 사람이며 지은 사람이 아니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종일토록 바삐바삐 하여 밖을 향하여 치구함에 각을 찾아도 원래 얻지 못하느니라. 비록 일물도 가히 얻을 수 없으나 만일 알지 못한다면 또한 선지자에게 참예하여 간절히 구해야 마음으로 하여금 알게 할지니라.
생사의 일이 크니 응당 공과空過하지 말지니라. 스스로 속이면 이익이 없느니라. 비록 진보가 산과 같고 권속이 항하사 모래 같을지라도 눈을 뜨면 곧 보려니와 눈을 감으면 도리어 보겠는가. 그러므로 함이 있는 법이 몽환 같은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만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공과하리라. 그렇다면 각성이 스스로 있으나 만일 스승을 인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밝게 알지 못하리라. 스승 없이 저 혼자 깨친 자는 만인 중에 희유하니라. 만일 자기가 인연으로써 회합하여 성인의 뜻을 얻은 자는 곧 선생을 참예할 것을 쓰지 말지니라. 이것은 나면서 아는 수승한 학문이다. 만일 깨치지 못한다면 모름지기 부지런히 애써 참학할지니라. 가르침을 인하여 바야흐로 깨침을 얻으리라. 만일 스스로 명료하다면 배우지 아니하여도 역시 얻으리니, 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아니하니라. 능히 검고 흰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각의 교칙을 펼친다면 각을 비방하며 법을 망령되이 하느니라. 이와 같은 등의 무리는 법설을 비와 같이 하더라도 다 이 마군의 설이니라. 곧 각설이 아니니 스승은 이 마군의 왕이요, 제자는 이 마군의 백성이다. 미혹한 사람이 저의 지휘를 받아 생사대해에 떨어짐을 깨닫지 못할지니라.
다만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망령되이 이 각이라고 일컫지만 이들 중생은 이 큰 죄인이니라. 저 일체중생을 속여서 마구니 경계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십이부경전을 설하여도 다 이 마군이 말이며 마군이 집의 권속이니라. 이 각가(불가)의 제자가 아니다. 이미 검고 흰 것을 가리지 못하거니 어찌 생사를 면하겠는가. 만일 견성하면 곧 각이요, 견성하지 못하면 곧 이 중생이니라. 만일 중생의 자성을 떠나서 별도로 각성을 가히 얻을 것이 있다면 각이 이제 어느 곳에 있는가. 곧 중생의 자성이 곧 이 각성이니라. 성품 밖에는 각이 없느니라. 각이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제한 밖에는 각을 얻을 수 없고 각 밖에는 성품을 얻을 수가 없느니라.”
묻길, “만일 견성은 아니하였을지라도 염각(염불)하고 송경하며 보시하고 지계하며 정진하여 널리 복리福利를 일으키면 성각(성불)함을 얻겠나이까?” 답하길, “얻지 못한다.” 또 묻길, “어찌 하여 얻지 못합니까?” 답하길, “적은 법이라도 가히 얻을 것이 있으면 이것은 함이 있는 법이고, 이것은 인과이며, 이것은 업보 받는 법이고, 이것은 윤회 받는 법이니라. 생사도 면치 못하거든 어느 때에 각도(불도)를 얻겠는가. 성각은 견성하여야 할 것이니, 견성을 못하면 인과를 말하는 것이 외도의 법이니라. 만일 각한다면 외도의 법을 익히지 말지니라. 각(부처)은 이 업이 없는 사람이며 인과가 없으니, 다만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을 것이 있으면, 다 각을 비방하느니라. 무엇을 의지(빙거)하여 이룸을 얻겠는가. 다만 한 마음이든지 하나라도 능한 것이든지 하나라도 아는 것이든지 하나라도 볼 것에 주착하면 각이 모두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각은 계행 가지고 범한 것이 없느니라. 심성이 본래 공空한 것이오. 또한 때 끼고 깨끗한 것과 모든 법이 없느니라. 닦고 증할 것도 없으며 인도 없고 과도 없다. 각은 계율 가지는 것도 아니고 각은 선정을 닦는 것도 아니니라. 각은 악을 짓는 것도 아니고 각은 정진하는 것도 아니며 각은 해태하는 것도 아니니라. 각은 이 지음이 없는 사람이니, 다만 주착하는 마음과 소견이 있으면 각이 곧 허락하지 아니하니라.
각은 이 각이 아니니 각이란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만일 이 뜻을 보지 못하면 일체 때 가운데와 일체 처소에 다 이 본심을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고 일체시중에 무작상 짓기를 헤아린다면 이것이 큰 죄인이며 이것이 어리석은 사람이니라. 무기공중無記空中에 떨어져 혼혼한 것이 술 취한 사람과 같아서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느니라. 만일 무작법 닦기를 헤아린다면 먼저 모름지기 견성한 연후에 분별하여 반연한 생각을 쉴지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고 각도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옳은 곳이 없느니라. 어떠한 사람이 인과를 쓸어 없애야 치연이 악을 지으면서 망령된 말을 함에, 본래 공한 것이어서 악업을 지어도 허물이 없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사람은 무간 흑암지옥에 떨어져 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니라. 만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와 같은 견해를 아니 할지니라.”
묻길, “이미 만일 시위운동과 일체시중에 다 이 본심이라면 색신이 무상할 때는 어찌 본심을 보지 못합니까?” 답하길, “본심이 항상 현전하지만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느니라.” 묻길, “마음이 이미 반드시 있다면 어떠한 연고로 보지 못합니까?” 사師가 이르시길, “네가 일찍이 꿈을 지었는가.” 답하길, “일찍이 꿈을 지었나이다.” 물으시길, “네가 꿈을 지을 때에 꿈을 꾸지 않을 때 몸과 같던가? 같지 않던가?” 답하길, “이 꿈 짓기 전에 본 몸입니다.” 또 묻길, “너의 언어시위운동이 꿈 짓기 전에 너와 다르던가. 다르지 아니하던가?” 답하길, “다르지 않습니다.” 사가 말씀하시길, “다르지 않다면 곧 이 몸이 너의 본 법신이며 곧 이 법신이 너의 본심이니라.”용성이 말하길, 이 말씀을 잘못 알면 크게 그르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꿈 가운데 보이는 자기의 몸과 몽식夢識으로 분별하는 것을 본심이라 하면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겠는가. 달마께서는 꿈에 보는 몸과 꿈에 분별하는 생멸심을 가르침이 아니라 생시에 능히 어묵동정하는 그 놈과 몽중에 어묵동정하는 그 놈과 그 두 가지가 근본적으로 자성이 둘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 마음이 무시광대겁으로 좇아오므로 지금과 더불어 다르지 아니하여 일찍이 생사가 없느니라. 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더하지도 아니하고 덜하지도 아니하며, 더럽지도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며, 고운 것도 아니고 미운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남녀상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으며, 또한 닦고 증득하는 것도 없고, 또한 인과도 없으며, 또한 각도 없으며 또한 한 근력도 없으며 또한 상보도 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취하려 해도 얻을 수 없으며 버리려 해도 얻을 수 없느니라. 산하석벽이 능히 장애하지 못하여 출몰왕래에 신통이 자재하니라. 오온산을 뚫으며 생사의 바다를 건너나니, 일체 업이 이 법신을 어찌 못하느니라.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색상色相과 다르니, 이 마음이 각(부처님)이니라. 사람마다 저 이 광명 가운데에서 손을 놀리고 발을 움직임을 보고자 하는 자가 항하사 모래 수와 같아서 묻는 데에 미쳐서는 다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마침 목인과 상사하나니, 다 자기의 수용하는 것인데 무엇을 인하여 알지 못하는가? 각께서 말씀하시길, 일체중생이 다 이 미혹한 사람이니라. 미혹함을 인하여 업을 지었기에 생사의 바다에 떨어져 아무리 나오고자 하여도 도리어 빠지나니, 다만 견성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중생이 만일 미혹하지 아니하다면 무엇을 인하여 묻는가? 그 중에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느니라. 자기가 손 놀리고 발 꿈쩍이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알라. 성인의 말씀은 어김이 없으시지만 미혹한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이 마음을 밝히기 어려우니 오직 각한 사람만 능히 이 마음을 알고 그 나머지 인천의 중생들은 다 밝게 알지 못하니라.
만일 지혜로 밝게 이 마음을 요달하면 바야흐로 이름이 법성이며, 또한 이름이 이 해탈이니 생사에 거리끼지 아니하며 일체법이 저것에 거리낌을 얻지 못함에 이 이름이 대자재각이며 또한 이름이 불사의며 또한 이름이 성체聖體며 또한 이름이 장생불사며 또한 이름이 대선이니라. (이름은 비록 같지 않지만 체는 곧 하나다.)
성인의 갖가지 분별이 다 자심을 떠나지 아니함이라 하시니, 심량心量이 광대하여 쓰는 데 응하여 무궁하다. 눈은 빛을 보며 귀는 소리를 들으며 코는 향기를 맡으며 혀는 맛을 알며 내지 시위운동이 다 이 자심이며 일체시중에 언어의 길이 끊어지며 심행처가 멸하나니, 이것이 자심이니라. 그러므로 이르길, 각의 빛이 다함이 없으며 지혜도 또한 그러하다 하시니, 색이 무진함이 이 자심이다. 심식이 잘 능히 일체를 분별하며 내지 시위운용이 다 이 지혜니, 마음이 형상이 없기에 지혜도 또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시길, 각의 색이 다함이 없고 지혜도 또한 다시 그러하다 하시니, 사대 색신은 곧 이 번뇌의 몸이기에 곧 생명이 있거니와 법신은 항상 주하여 주한 바 없다. 대각의 법신이 항상 변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길, 중생이 마땅히 각성이 본래 있는 것을 알 것이라 하시니, 가섭은 다만 본성을 깨치시고 다시 다른 일이 없으시니, 본성이 곧 이 마음이요, 마음이 곧 이 성품이니, 이것이 곧 제각심(모든 부처님의 마음)이다. 전각후각(전불후불)이 다만 이 마음을 전함이니, 이 마음을 제한 밖에는 각(부처)을 가히 얻을 것이 없느니라.
전도한 중생이 자심이 이 각임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하여 치구하되 날이 마치도록 바쁘고 바쁘게 염각예각(염불예불) 하나니, 각(불)이 어느 곳에 있는가? 마땅히 이와 같은 소견을 짓지 말라. 다만 자심만 알면 마음 밖에 다시 각이 없느니라. 경에 말씀하시길, 무릇 상 있는 바가 다 이 허망한 것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있는바 곳에 각이 있다 하시니, 자심이 이 각이니라. 마땅히 각을 가져 각께 예배하지 말라. 다만 이 각과 및 정사(보살)의 상모가 홀연히 나타나거든 간절히 예경하지 말라. 나의 마음이 공적하여 본래 이와 같은 상모가 없으니, 만일 상을 취하면 곧 이 마가 섭수한 것이라 다 사도에 떨어지리라. 만약 환이 마음으로 좇아 일어남을 알면 곧 예배를 하지 아니할지니라. 예배하는 자는 알지 못한 것이요, 아는 자는 예배하지 아니하나니, 예배하는 것은 마귀에 섭수함을 입는 것이니라.용성이 이르길 도를 참으로 깨친 자는 예배하여도 좋고, 예배 아니하여도 좋으니, 허공에 나는 새가 자유로 임할 것이다. 마가 진법계와 같은지라 무슨 방해자 있으리오. 조사의 뜻은 식심 환변의 경계에 착하여 실성할까 접하심이다. 학인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이에 가린다.
제각의 본성체상에 도무지 이와 같은 상모가 없으니, 간절히 모름지기 뜻에 둘지어다. 다만 다른 경계가 있거든 간절히 캐지도 말며, 또한 겁도 내지 말며 또한 의혹심도 내지 말라. 나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거니, 어느 곳에 이와 같은 상모가 있겠는가. 나아가 천룡, 야차, 귀신, 제석, 범천왕 무리일지라도 또한 경중심을 내지 말며 또한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마음이 본래 공적하기에 일체 상모가 다 이 허망하니라. 다만 상을 취하지 말지어다. 만일 각의 소견과 법의 소견을 일으키거나 및 각과 정사의 등상에라도 경중심을 내면 저는 스스로 중생의 위치 가운데 떨어지리라. 만일 진실로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일체 상을 취하지 아니하면 곧 얻을지니, 다시 별도의 말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길, 무릇 상이 있는바 다 이 허망한 것이라고 하니라. 모두 일정한 실상이 없으며 환꼭두각시이 일정한 상이 없다. 이는 무상한 법이니, 다만 상을 취하지 아니하면 저 성인의 뜻에 칭합하리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길, 일체 상을 떠나면 곧 이름이 제각이라 하시니라.
묻길, “어찌 각(불)과 정사(보살)에게 예배를 말라 하십니까?” 답하길, “천마 파순이와 아수라 무리들이 신통을 나타내어 다 각과 정사의 상모를 지음으로써 능히 여러 가지 변화를 하나니, 이것이 외도이라 다 각이 아니니라. 각은 이 그대의 마음이라. 그릇 각께 예배하지 말지어다. 각은 중국말이니, 우리말로 하면 깨친 성품이라는 말이니라. 깨친 것이라는 것은 이 신령하게 깨친 것이니라. 기틀을 응하여 물건을 제접하며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박거리며 손을 내두르고 발을 준동하는 것이 다 나의 마음이 영각한 성품이니라.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각이요, 각이 곧 도요 도가 곧 각이니, 각이라는 것은 범부의 측량할 바 아니니라. 또 본성을 보는 것으로 각을 삼는 것이니, 만일 본성을 보지 못하면 다만 곧 각이 아니니라. 가사 천경만론을 다 말하더라도 성품을 보지 못하면 다만 범부이고 각법이 아니니라. 지극한 도는 깊고 깊어 말로 할 수 없으니, 경전에 무엇을 의지하여 미치겠는가. 다만 본성만 보면 일자무식이라도 또한 얻느니라. 견성이 곧 이 각이니, 성체가 본래 청정하여 잡되고 더러움이 없다. 모든 말씀은 다 성인의 마음으로 좇아 씀을 일으킴이니, 쓰는 본체가 본래 텅 비어 이름과 말도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데 십이부경이 어찌 미치겠는가. 도가 본래 뚜렷이 이룬 것이기에 닦고 증득함을 쓰지 아니하는 것이며, 또는 소리와 빛이 있는 것이 아니고 미묘하여 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것을 자기가 아는 것과 같으니라. 또한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말하지 말지어다. 오직 대각께서 아시고 인간 사람과 하늘 사람들은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범부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기에 그런 까닭으로 상을 집착하느니라.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적함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모든 상과 일체법을 집착하면 곧 외도에 떨어지리라.
만일 모든 법이 마음을 좇아 남을 알면 마땅히 있는 것을 집착하지 말지니, 집착하면 곧 알지 못하리라. 만일 본성을 보면 십이부경이 다 부질없는 문자니라. 천경만론이 다만 마음을 밝힌 것이니, 법을 가르친 말 아래에 확연히 계합하여 알면 경전을 장차 어디 쓰겠는가. 지극한 이치는 말이 끊어진 것이고, 경전은 이 말이니, 진실로 이 도가 아니니라. 만일 밤의 꿈에 궁전 누각이든지 코끼리나 말이나 그러한 무리든지 및 수목총림이든지 못이나 정자나 이와 같은 모양을 보거든 한 생각이라도 낙착심을 일으키지 말지니, 다 이 내가 의탁해서 나는 곳이 되느니라. 정신을 단단히 차려 간절히 뜻을 둘지어다. 임종 시에 도무지 상을 취하지 아니하면 곧 의심을 제하려니와 호말이라도 생각을 일으키면 곧 마에 포섭되리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받는 것이 없건만 다만 미혹한 것을 인연하기 때문에 깨치지 못하고 알지 못한 것이니, 이것을 인하여 망령되이 업보를 받음에 그런 까닭으로 낙착이 있기 때문에 자재치 못하리라.
지금에 만일 본래 마음을 깨치면 곧 습기에 물들지 아니하리라. 만일 성인으로 좇아 범부에 들어 여러 가지 잡된 무리를 나타내는 것은 스스로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니라. 성인은 거슬리고 순종하는 데 다 자재함을 얻으시어 일체 업이 저 성인을 구속하지 못하니라. 성인을 이루어 오래됨에 큰 위덕이 있나니, 일체 품류의 업각항차별 업력이 저 성인에게 굴림을 입어 천당 지옥이 저 성인을 어찌하지 못하니라. 범부는 신식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어두워 성인의 내외가 명철한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만일 의심이 있거든 곧 짓지 말지니, 의심을 지으면 곧 생사에 유랑하리니, 후회하여도 쓸 곳이 없으리라. 빈궁하고 곤고한 것이 다 망상으로 좇아 나는 것이니, 만일 마음을 요달하여 서로서로 권면함에 다만 지음이 없이 지으면 곧 대각의 지견에 들어가리라. 초발심인은 신식이 다 정하지 못한 것이니, 만일 꿈에 자주 기이한 경계를 볼지라도 문득 의심치 말지어다. 다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밖으로 좇아오는 것이 아니니라. 꿈에 만일 광명이 나타남이 해보다 더 지나가면 곧 남은 습기가 다하고 법계성이 나타나고자 함이니라. 만일 이 일이 있으면 성각할 인연이니, 오직 자기만 알고 가히 타인을 향하여 말하지 말지어다.
혹 고요한 원림 가운데 행주좌와하다가 눈에 광명이 혹 크고 적음을 볼지라도 타인에게 말하지 말며, 또한 취착하지도 말지니 역시 자성광명이니라. 혹 어두운 밤 가운데 행주좌와하다가 눈에 광명을 보는 것이 낮과 다름없더라도 괴이쩍게 여기지 말지니, 아울러 자심이 밝고자 함이니라. 혹 밤의 꿈 가운데에 별과 달을 분명히 보면 또한 자심에 모든 인연이 쉬고자 함이니, 또한 타인에게 말하지 말지어다. 꿈이 만일 혼혼하여 마침 어둡고 음침한 곳에 닿는 것과 같으면 역시 자심에 번뇌장애가 무거운 것이니 또한 알지어다. 만일 본성을 보았거든 독경 염각하지 말지니, 널리 배워 많이 아는 것이 이익이 없는지라 신식이 전전이 어둡다. 설교는 다만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니, 만일 마음을 안다면 어찌 간교看敎를 쓰겠는가. 만일 범부로 좇아 성인에 들어간다면 곧 업을 쉬고 신통을 길러 분을 따라 날을 지낼지어다. 만일 진에가 많다면 도와 어기는 것이니, 자기가 자기를 속여 이익이 없다. 성인은 생사 가운데에서 자재하게 출몰하시어 숨고 나타나는 것이 일정한 것이 없으니, 일체 업이 저 성인을 구속하지 못하며 능히 사마를 항복 받으라. 일체중생이 다만 본성을 보면 습기가 다 없어지고 신식이 밝아 문득 알지니, 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한 법도 집착하지 말고 업을 쉬고 정신을 기를지어다. 습기가 또한 다하면 자연히 명백하여 공들임을 쓰지 아니할지니라.
외도는 각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공력은 가장 많이 쓰나 성인의 뜻에 가장 어기는 것이니라. 날을 마치도록 구구히 하여 염각 독경을 하더라도 신성이 어두워신령스러운 성품이 어두워 윤회를 면치 못하니라. 각은 이 한가한 사람이라 어찌 구구하겠는가. 널리 명리를 배워 어디에 쓰겠는가. 다만 견성하지 못한 사람은 동경 염각하며 길이 정진하며 육시에 행도예배하며 항상 앉아 눕지 아니하며 널리 배우고 많이 듣는 것으로써 각의 법을 삼나니, 이러한 중생은 다 이 각의 법을 비방하느니라. 전각후각이 다만 견성을 말씀하시니, 만일 견성치 못하고 망령되이 내가 무상대도를 얻었다고 한다면 이것들은 큰 죄인이니라. 십대제자 가운데에 경희가 박학다문하시어 식견이 제일이나 각께서 꾸중하시어 다만 성문과 외도로 모든 식견을 놓아 버리게 하시니, 식수를 닦아 증득하는 것은 인과 가운데에 떨어지느니라. 이것은 중생의 업보로 생사를 면치 못하며 각의 뜻에 크게 어긋난 것이니, 곧 각을 비방하는 중생으로 죽여도 죄가 없다. 만일 진정한 신심이 있다면 이 사람은 각의 위에 있는 사람이니라. 만일 견성치 못하면 간절히 양선한 사람을 비방하지 말지어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어서 유익함이 없다. 선악이 역연하고 인과가 분명하여서 천당 지옥이 목전에 있느니라.
미련한 사람은 믿지 아니하여서 흑암지옥에 떨어져도 또한 깨치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니, 다만 업이 중하기 때문에 믿지 아니하느니라. 비유하건댄 눈이 없는 사람이 낮에 광명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나니, 비록 저를 향하여 말할지라도 또한 믿지 아니하는 것은 다만 눈이 먼 까닭에 무엇을 의거하여 낮에 광명을 가리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현금에 축생 잡류에 떨어지며 빈궁하천에 탄생하여 있어 살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며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나니, 비록 이 고통을 받으나 바로 물으면 대답하길, 나의 즐거움이 천당과 다르지 아니함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알라. 일체중생은 나는 곳으로 쾌락을 삼아 깨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느니라. 이와 같은 악인은 다만 장애가 무거울 뿐이니라. 만일 자심이 이 각임을 본다면 수발을 깎고 승려가 되는 데 있지 아니하니, 백의 입은 속인이라도 또한 각이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머리 깎고 승려가 되어도 또한 외도이니라.”
묻길, “세인은 처자가 있어 음욕을 제거하지 못하거니, 어찌 성각함을 얻겠습니까?” 답하길, “견성만 말하고 음욕을 말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견성만 하면 음욕은 본래 공적한 것이다. 끊기를 가자할 것도 아니며 또한 낙착할 것도 아니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능히 해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성품이 본래 청정한 연고니, 비록 오온색신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더럽히지 못하느니라. 자성은 본래 받는 것도 없으며 주리고 목마른 것도 없으며 한열도 없으며 질병도 없으며 은혜도 없으며 권속도 없으며 고락도 없으며 호오도 없으며 장단도 없으며 강약도 없어 본래 한 물건도 없지만 다만 색신이 있는 것을 인연하여 곧 기갈·한열·장병 등이 있나니, 만일 속지 아니한다면 한번 짓기를 무던히 할지어다. 만일 생사 가운데 자재함을 얻어 일체법을 능히 굴리어 성인의 신통과 자재 무애한다면 처소마다 편안치 아니한 곳이 없느니라. 만일 의심이 있으면 결정적으로 일체경계를 뚫어 내지 못하여 생사윤회를 면치 못할지니라. 만일 견성만 하면 소 잡는 백정이라도 또한 성도하리라.”
묻길, “전다라는 살생작업하거니 어찌 성각하겠습니까?” 답하길, “다만 견성만 말하고 작업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미혹한 사람과 같지 아니하기에 일체 업이 견성한 사람을 구속하지 못하니라. 무시광대겁으로부터 좇아옴으로 다만 견성을 못했기에 지옥 가운데 떨어지나니, 그런 까닭으로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거니와 본성을 깨치면 마침내 업을 짓지 아니하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염각이라도 업보를 면치 못하나니, 살생을 의논할 것이 아니니라. 만일 견성해서 의심이 없으면 생명을 살해하였더라도 또한 업력이 저 견성한 사람을 어찌하지 못하니라. 서천 이십팔조로부터 다만 이 서로서로 심인을 전하시고 나도 이제 이 나라에 온 것은 오직 돈교대기에 즉심시각을 전하고 계율을 가지고 정진하고 고행하며 내지 물과 불 중에 임의로 들어가고 검륜 위에도 올라가며 일종식하고 밤이나 낮이나 앉아서 눕지 아니한 그런 것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그것들은 외도의 유위법이요 각법이 아니니라. 만일 시위운동하는 영각의 성품을 알면 너의 마음이 곧 제각심이다. 전각후각이 다만 마음을 전하는 것만 말하시고 다시 별법이 없다. 만일 이 마음을 알면 일자무식이라도 또한 각이니라. 만일 자기 영각의 자성을 알지 못하면 가사 몸을 미진같이 부수더라도 성각은 못하느니라. 각이라는 것은 또한 이름이 법신이며 또한 이름이 각심이니, 이 마음은 형상이 없으며 인과가 없으며 힘줄과 뼈가 없느니라.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할 수 없나니, 질애가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하며 외도와 같지 아니하다. 이 마음은 대각만 능히 아시고 그 미혹한 중생들은 밝게 알지 못하니라.”
이 마음은 사대 색신을 떠나지 아니하니, 만일 이 마음을 떠나서는 곧 능히 운동하는 것이 없다. 이 몸이 앎이 없는 것이 초목와력과 같으니라. 이 몸은 무정하거니 무엇을 인하여 운동하는가. 만일 마음으로부터 내지 언어 시위운동과 견문각지가 다 이 동한 마음이 동한 작용이며 동한 것은 이 마음이 동한 것이니라. 동한 것은 곧 그 작용이니, 동한 작용 밖에는 따로 심이 없고 심 외는 따로 동이 없느니라. 동한 것을 이 심이라 할 수 없고 심을 이 동이라 할 수 없으니, 동의 근본이 심이 없고 심의 근본이 동이 없기 때문이다. 동은 심을 떠난 것이 아니요, 심은 동을 떠난 것이 아니나 심은 떠나고 떠난 것이 없으며 심은 동하고 동한 것이 없다. 이 심이 작용하고 작용하는 것이요, 곧 심의 전체가 동하고 동하느니라. 동도 아니요 용도 아니니 용체가 본래 공하여 그 공한 근본은 동이 없기 때문이다. 동용이 한 가지 마음이나 마음 근본은 동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길, “동하여도 동한 바가 없다 하시니, 날이 마치도록 거래하여도 일찍이 웃어도 거래함이 없고, 날이 마치도록 보아도 일찍이 보는 것이 없고 날이 마치도록 웃어도 일찍이 웃는 것이 없고, 날이 마치도록 들어도 일찍이 듣는 것이 없고, 날이 마치도록 즐거워하여도 일찍이 즐거워하는 것이 없고, 날이 마치도록 다녀도 일찍이 다니는 것이 없고, 날이 마치도록 머물러도 일찍이 머무는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길, “언어도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함”이라 하시니, 견문각지가 본래 스스로 두렷이 고요하며 나아가 진심이 나고 기꺼워하고 아프고 가려움이 어찌 목인과 다르겠는가. 전전이 추구하여 찾음에 아프고 가려움을 얻지 못할지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길, “악업은 괴로운 과보를 얻고 선업은 착한 과보를 얻는다.”라고 하시니, 다만 악은 지옥에 떨어지고 선은 천상에 날 뿐만 아니라, 만일 선악의 진희가 공한 줄을 깨쳐 다만 집착심이 없으면 곧 업력을 벗으리라. 만일 견성치 못하면 경론을 강하더라도 결정적으로 의거할 곳이 없으리라. 말로 다할 수 없기에 간략히 삿됨과 바름을 표함을 이와 같이 하지만 낱낱이 미치지 못하니라.
송하여 말하되
마음마음이라고 하는 마음이여! 가히 찾기 어렵다. 너그러울 때에는 법계에 편만하고, 좁을 때에는 또한 바늘도 용납할 수 없다.
나는 본래 마음을 구하고 각을 구하지 아니한다. 삼계가 공하여 물건이 없음을 밝게 알았다. 만일 각을 구하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구할지니, 다만 마음마음이라고 하는 마음이 이 각이다.
나는 본래 마음을 구하여 마음을 스스로 가진다. 마음을 구함에 실어금 마음 알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각성은 마음 밖을 좇아 얻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생함에 문득 이 죄가 생하는 때니라.
게를 설하여 말하되
내가 본래 이 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정을 구원하려 함이다.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림에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화엄경』에 말씀하시길,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 일체 모든 선근을 기른다.”라고 하며, 『유식론』에 말씀하시길, “믿음은 물을 맑히는 구슬과 같다.”라고 하시니, 그러므로 일만 선을 발생함은 믿음이 앞을 인도함을 알지니라. 각경의 첫머리에 여시아문을 세우는 것은 믿음을 내게 함이다. 조사의 문의 믿음이 교문의 믿음으로 더불어 무엇이 다릅니까? 답하길, 여러 가지가 다르니라. 교문에는 인천으로 하여금 인과를 믿게 하여 복락을 사랑하는 자는 십선을 믿음으로 묘한 인을 삼아 인간 천상에 나는 걸로 즐거운 결과를 삼으며, 공적을 즐기는 생멸인연을 믿음으로 정인을 삼아 고집멸도로 성과를 삼으며, 각과를 즐기는 자는 삼무수겁에 육도만행을 닦음으로 큰 인을 삼고 성정각으로 정과를 삼거니와 조사문중에 정신은 교문에 믿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일체 유위인과를 믿지 아니하고 단지 자기 심성이 본래 대각임을 믿을지니, 천진자성이 사람사람이 구족하고 자성묘체가 각각이 원성하여 타인에게 구함을 가자하지 아니하니라. 종래로 스스로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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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 이르시길, “두렷이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건마는 진실로 취사를 말미암은 까닭으로 같지 아니하다.”라고 하였고, 지공이 이르시길, “상이 있는 몸 가운데에 상이 없는 몸이요, 무명의 길 위에 생사가 없는 길”이라 하시며, 영가 이르시길,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각성이요, 환화 헛된 몸이 곧 법신이라.”라고 하시니, 그러므로 알라. 중생이 본래 이 각이다. 이미 정신正信을 내었더라도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하리라. 영명이 이르시길, “나의 성리를 알지 못하고 믿기만 하면 무명을 증장하고 알고 믿지 아니하면 사견을 증장함이라.”라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믿음과 아는 것이 서로 겸하여야 도에 들어감이 빠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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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이르길, “처음으로 신심을 발하여 능히 도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이익이 있습니까?” 답하되, “『기신론』에 이르시길, ‘만일 사람이 이 법을 듣기를 마치고 겁내지 아니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바로 각성종자를 이루리라. 반드시 자각의 수기한바 되리니, 가사 어떠한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화하여 하여금 십선을 행케 하더라도 어떠한 사람이 한 생각 사이에 바로 이 법을 생각함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을 지나서 가히 비유치 못할 것이라’고 하시고, 또 『반야경』에 이르시길, ‘내지 일념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는 대각(여래)이 다 알며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무량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이것을 알아라. 천리를 가고자 한다면 첫걸음을 바로 할 것이다. 초보를 만일 어기면 천 리가 함께 어긴 것으로 무위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처음 신심을 바로 할 것이니, 처음 믿음을 이미 잃어버리면 만선이 함께 물러갈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 이르시길, ‘호리라도 어김이 있으면 천지현격이라’고 하시니, 이 이치니라.”
혹 이르길, “이미 정신바로 믿는 것을 내었지만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이름이 진심입니까?” 답하길, “망령된 것을 떠난 것이 참된 것이요, 신령스럽게 감각하는 것을 마음이라 하나니, 『능엄경』에 이 마음을 발명하시니라.” 혹 이르길, “다만 이름을 진심이라 합니까? 별도로 바른 명호가 있습니까?” 답하길, “각교 조교가 이름을 세움이 다르니, 또한 각교는 정사(보살)계에 심지라고 부르니, 만선을 발생하는 연고요. 『반야경』에 정각이라고 부르나니, 각으로 체가 된 연고요, 『화엄경』에 법계라고 세우는 것은 서로 사귀어 융통하게 섭수하는 연고요, 『금강경』에 여래라고 하시니, 좇아오는 바가 없는 연고요, 『반야경』에 열반이라 하나니, 여러 성현이 돌아가 의지하는 연고요, 『금광명경』에 여여라 하나니, 참으로 떳떳하여 변치 않는 연고요, 『정명경』에 법신이라 하나니, 보신각(보신불)과 화신이 의지한 연고요, 『기신론』에 진여라고 하나니, 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한 연고요, 『열반경』에 각성(불성)이라 하나니, 삼신의 본체인 연고요, 『원각경』에 총지라 하나니, 공덕을 출생하는 연고요, 『승만경』에 여래장이라 하나니, 번뇌가 여래를 능히 숨기어 덮는 연고요, 또 여래가 능히 자체 내에 만법을 머금어 섭수하는 연고요, 『요의경』에 원각이라 하나니, 어둔 것을 파하고 홀로 비추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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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말미암아 연수 선사73)
가 『유심결』에 이르시길, ‘한 법의 이름이 천 가지다. 인연을 응하여 호를 세움’이라 하시니, 갖추어 여러 경에 설하였느니라. 능히 갖추어 인증할 수 없다.” 혹 이르길, “각교(불교)는 이미 알았거니와 조사의 교는 어떠합니까?” 답하길, “조사의 문하는 이름과 말을 두절막아 끊는다는 말하여 일명도 세우지 아니하였거니, 어찌 이름하겠는가마는 감응에 응하고 기틀을 좇아 그 이름이 또한 많다. 어떤 때에는 정안이라 하나니 모든 상 있는 것을 감각하는 연고요, 어떤 때에는 묘심이라 하나니 허령적조한 연고요, 어떤 때에는 주인옹이라 하나니 종래로 어깨에 매인 연고요, 어떤 때에는 무저발이라 하나니 곳을 따라 생활하는 연고요, 어떤 때에는 줄 없는 거문고라 하나니 금시를 울려 내는 연고요, 어떤 때에는 무진등이라 하나니 미혹한 망정을 비추어 타파하는 연고요, 어떤 때에는 뿌리 없는 나무라 하나니 뿌리와 꼭지가 견고한 연고요, 어떤 때에는 취모검이라 하나니 근진(육근과 육진)을 절단하는 연고요, 어떤 때에는 무위국이라 하나니 해안하청(태평세월)한 연고요, 어떤 때에는 마니주라고 하나니 빈궁을 건너는 연고요, 어떤 때에는 무수쇄라 하나니 육정을 개폐(六情開閉)하는 연고요 내지 이름이 진흙 소와 나무 말이며 심원이고 심인이며 심경이고 심월이며 심주며 가지가지 다른 이름을 가히 갖추어 기록하지 못하니라. 만일 참마음을 통달하면 모든 이름을 다 알겠지만 이 진심을 매하면 모든 이름을 다 알지 못할지니라. 그러므로 저 진심에 간절히 자세히 할지니라.”
혹 이르길, “진심의 명자는 이미 알았거니와 그 체가 어떠합니까?” 답하시길, “『방광반야경』에 이르시길, ‘지혜는 형상이 없기에 생멸이 없다’ 하시고, 『기신론』에 이르시길, ‘진여 자체는 일체 범부, 성문, 연각, 정사(보살), 제각(諸佛)이 증감이 있음이 없어 전제에 생하는 것도 아니며, 후제에 멸하는 것도 아니니, 필경에 항상하여 본래로 좇아서 옴으로 성품이 스스로 일체 공덕이 만족함’이라 하시니, 이 경론을 의거하면 진심본체가 인과에 초출하며 고금을 관통함이라. 범성을 세우지 아니하여 모든 대대가 없는 것이 태허공이 일체 처소를 두루하는 것과 같다. 묘체가 고요하여 모든 희론이 끊어졌다. 나는 것도 아니며 멸한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요동치 아니하여 깨끗하게 항상 있나니, 옛날 주인옹이라 하며, 또한 위음나반인이라 하며, 또한 이름이 공겁 이전 자기라 하나니, 한 가지 평평한 생각을 하면 섬호의 티끌도 가림이 없나니, 일체 산하와 초목 총림과 만상삼라와 염정제법이 다 가운데로 좇아 나느니라. 그러므로 『원각경』에 이르시길, ‘선남자야, 무상법왕에게 대다라니 문이 있으니 이름이 원각이다. 일체 청정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및 바라밀을 유출하야 정사를 교수한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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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봉이 이르시길, ‘마음이라는 것은 비고 미묘하여 정밀하고 빛나면서 신령하여 밝다. 무래무거라 그윽이 삼제三際에 통하고 비중비외하여 훤출이 시방에 사무쳤다. 불생불멸이라 어찌 사생(生老病死)이 가히 해롭게 하며, 성품을 떠나고 상도 떠났는데 어찌 오색이 능히 눈을 멀겠는가?’ 하며, 영명이 『유심결』에 이르시길, ‘대저 이 마음은 모든 묘한 것과 모든 신령한 것이 널리 모인 것이다. 만법에 왕이 되고 홀로 귀하며 견줄 데가 없고, 짝이 없나니 진실로 대도의 근원이며 이 진법의 강요다. 믿으면 삼세 정사가 한 가지 이 마음을 배우며 삼세 제각이 한 가지 이 마음을 증득하며, 일대장교가 이 마음을 나타내며, 일체중생이 이 마음을 미혹한 것이며 일체 수행인이 이 마음을 깨친 것이며, 일체 모든 조사의 서로 전한 것이며, 천하 행자가 이 마음을 참방하는 것이라. 이 마음을 통달한다면 두두가 다 이것이며 물물이 온전히 드러남이요, 이 마음을 미혹한다면 처처에 전도하며 염념이 치광함이니라. 이 본체는 이 일체중생의 본유각성이며 일체 세계를 발생하는 근원이다. 그러므로 대각이 영축봉에서 양구하시고 선현(수보리)이 바위 아래에서 말을 잊으셨다. 달마는 소실에서 벽을 관하시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에서 입을 막으시니, 다 이 마음의 묘체를 발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조사문정에 들어오는 자는 종요로이 먼저 이 마음의 본체를 알지니라.’”
혹 이르길, “묘체는 이미 알았거니와 어찌 이름을 묘용이라 합니까?” 답하시길, “고인이 이르길, ‘바람이 동함에 마음 나무가 흔들리고 구름이 일어남에 성품의 티끌이 일어남이라. 만일 금일의 일을 밝힌다면 본래의 사람을 매각할 것이니, 이는 이에 묘체의 용을 일으킴이라. 진심묘체는 본래 동하지 아니하여 안정진상하나 진상체상에 묘용이 현전하니, 유를 따라 묘를 얻음이 방해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조사가 송하여 이르시길, ‘마음이 일만 경계를 따라 굴리나 굴리는 곳에 다 능히 깊숙하다. 유를 따라 성품을 알면 즐거워함도 없고, 또한 근심도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일체 시중에 동용시위動用施爲하되 동서에 왕래하며 밥 먹고 옷 입으며 숟가락 잡고 젓가락을 희롱하며 왼쪽 보고 오른쪽 보는 것이 다 참마음에 묘용이 현전한 것인데 범부는 미혹함에 전도되어 옷 입을 때에 다만 옷 입는 알음알이를 지으며, 밥 먹을 때에 다만 밥 먹는 알음알이를 짓나니, 일체 사업이 다만 상을 따라 굴림에 그런 까닭으로 날로 쓰면서 깨치지 못하며, 목전에 있지만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이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동용시위에 일찍이 매각하지 아니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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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조사 이르시길, “모태에 있어서는 이름이 신神이요, 세상에 처해서는 이름이 사람이요, 눈에 있어서는 보고, 귀에 있어서는 듣고, 코에 있어서는 냄새 맡고, 입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어서는 잡고, 발에 있으면 달아나나니, 두루 나타나면 함께 법계를 꾸리고 거두면 일 미진에 있나니, 아는 자는 이 각성이거니와 알지 못하는 자는 정혼이라 불러 짓는다고 하니, 그런 까닭으로 도오道吾는 홀로 춤추고, 석공은 활을 버티고, 비마는 나무집게를 가지고, 구지는 손가락을 세우고, 흔주는 땅을 치고, 운암은 사자를 희롱하는 것이 여기에 나타내어 이런 대용을 발명치 아니함이 없으니, 만약 일용에 미혹하지 아니하면 자연히 종횡으로 무애할지니라.”
혹 말하길,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진심체용이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답하길, “현상을 잡으면 하나가 아니요, 본성을 잡으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본체와 작용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어찌해서 그러함을 아는가? 시험 삼아 의론하리라. 묘체는 동일하지 아니하여 모든 대대가 끊어져 일체 상을 여의었으니, 성품을 통달하여 증득한 자가 아니면 그 이치를 측량하지 못할지니라. 묘체가 연을 따라 모든 만 가지를 응하거든 망령되이 헛된 모양을 세워 형상이 있는 듯하니, 이 유상무상을 잡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 또 용은 체를 좇아 발현하기에 용이 체를 여의지 못하고, 체는 능히 용을 발현한 것이기에 체는 용을 여의지 못하나니, 이것은 서로 여의지 못함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니라. 물은 젖는 것으로 체를 삼나니, 체는 동치 아니하는 연고요, 파도는 동함으로써 상을 삼나니, 바람을 인하여 일어난 연고이니라. 물의 성품과 파도의 형상이 동하고 다만 동하지 아니하는 연고로 하나가 아니다. 파도 밖에는 물이 없고 물 밖에는 파도가 없기에 습성이 이 하나인 연고로 다른 것이 아니니, 체용이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하나임을 가히 알지니라.”
혹 이르길, “진심체용이 사람사람이 갖추어 있건만 어찌 성인범부가 같지 않습니까?” 답하길, “진심은 성인범부가 본래 같지마는 범부는 망령된 마음으로 물건에 집착하여 스스로 청정한 성품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에 막힌 바가 되었기에 그런 까닭으로 진심이 나타나지 못함이 어두운 가운데 나무 그림자와 같고, 땅 아래 흘러가는 샘과 같아서 있어도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길, ‘선남자여! 비유하건대 청정마니보주가 오색을 비추어 방소를 따라 각기 나타나거든 모든 우치한 자는 마니구슬에 실제로 청, 황, 적, 백 오색이 있는 것으로 보느니라. 선남자여! 원각의 청정한 성품이 몸과 마음을 나타내어 유를 따라 각기 나타나거든 저 우치한 자들은 깨끗한 원각의 성품에 실제로 이와 같은 몸과 마음의 모든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마니구슬에 오색이 있다는 것과 같으니라. 『조론』에 이르길, ‘건곤 안과 우주 사이에 그 가운데 한 보배가 형산(오온산)에 감추어져 있다’ 하니, 이는 이에 참마음이 번뇌에 얽힌 가운데 있느니라. 또 자은이 이르시길, ‘법신이 본래 있어 제각과 범부가 한 가지로 같건마는 망령된 것이 덮여 있음을 말미암아 번뇌로 감싸 얽힘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래를 감득하였다는 이름을 얻음’이라 하며, 배 상국이 이르길, ‘날이 맞도록 원각이나 일찍이 원각이 아닌 자는 범부’라 하니, 그러므로 알라. 진심이 비록 진로에 있으나 진로에 더럽힘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 백옥을 진흙에 던짐에 그 빛이 고치지 아니한 것과 같으니라.”
혹 이르길, “진심이 망령된 데 있으면 이 범부니, 어떻게 해서 망령된 데서 벗어나 성인이 되옵니까?” 답하길, “고인이 이르길, ‘망심이 없는 곳이 곧 정각이요, 생사와 원적이 본래 평등하다’ 하며, 경에 이르시길, ‘그 중생의 허환한 몸이 멸하므로 허환의 마음이 또한 멸하며 허환의 마음이 멸하므로 허환의 티끌이 또한 멸하며 허환의 티끌이 멸하므로 허환한 것이 멸한 것도 또한 멸하며 환멸한 것이 멸함으로 환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아니하나니, 비유컨대 거울을 닦음에 때가 다하면 밝은 것이 나타남과 같다’ 하시며, 영가 이르시길, ‘마음은 뿌리요, 법은 이 티끌이다. 두 가지가 마침내 거울 위에 흔적 같다. 때가 다할 때에 거울의 광명이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잊음에 성품이 곧 참되다’ 하니, 이것은 망령된 데서 뛰쳐나와 참됨을 이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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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이르길, “장자가 이르길, ‘마음은 그 뜨거움에 불타는 듯하며 얼음이 엉키는 듯하며 그 빠름은 쳐다보고 내려다볼 사이에 두 번이나 사해 밖을 쫓아 다니며 그 기거함에 맑아 고요하고 그 준동함에 하늘에 매달린 자는 그 오직 사람의 마음’이라 하니, 이것은 장자가 먼저 범부의 마음을 조복하지 못함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입니이다.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종문에는 어떤 법으로써 망심을 다스립니까?” 답하길, “무심법으로 망심을 다스리느니라.” 혹 이르길, “사람이 무심하면 문득 초목과 같으니, 무심이라는 말을 청컨대 방편을 베푸소서!” 답하길, “이제 무심을 말하는 것은 참마음의 체가 없다는 것으로 무심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빈병을 말하자면 병 가운데 물건이 없는 것을 빈병이라 하는 것이요, 애초에 병이 없는 것을 빈병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사 말씀하시길, ‘네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으며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비고도 신령하고 고요하고도 묘하다’ 하니, 이것이 마음의 취지이다. 이것을 들지라도 망령된 마음만 없을지언정 진심묘용이 없단 말이 아니다. 종래로 제조사가 무심 공부 짓는 것을 말한 것이 종류가 각기 다르니, 이제 대의만 거두어 간략히 십종으로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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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깨치어 살피는 것이니, 공부를 할 때에 평소에 생각을 끊어 생각이 일어남을 막되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거든 문득 깨달아 타파할 것이니, 망령된 생각을 깨쳐 타파하면 뒷생각이 나지 아니하리라. 이 깨친 지혜도 또한 모름지기 쓸 것이 아니니, 번뇌 망상이나 깨치는 지혜나 다 한 가지 잊어버리는 것을 이름이 무심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조사 이르시길, ‘생각이 일어남을 무서워 말며, 오직 깨치기 더딜까 두려워하라’ 하시며, 또 게송에 이르시길, ‘별도로 참된 도를 구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소견을 쉬라’ 하니, 이것이 식망息妄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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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쉬는 것이니, 공부 지을 때에 선악을 생각지 말고, 마음이 일어나거든 문득 쉬며, 인연을 만나거든 문득 쉬라. 고인이 말하길, ‘한 가지 매우 단련된 흰 비단같이 하얗게 되어 가며, 차가운 연못물같이 하여 가며, 옛 사당 속에 향로와 같이 하여 가라’고 하니, 바로 섬진이 끊어져 분별을 여의어 어리석은 듯 오뚝한 썩은 고자백이나무같이 되어야 바야흐로 조금이나 상응하리니. 이것이 휴헐망심休歇妄心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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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마음은 없이 하고 경계만 두는 것이니, 공부를 할 때에 일체 망념을 함께 쉬어 외경을 돌아보지 말고 다만 스스로 마음만 쉴지니, 망념이 이미 쉬면 어찌 경계가 있는 것이 방해하겠는가. 곧 고인의 사람사람은 마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아니한 법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말(有語)에 이르길, ‘이곳에 방초가 있어서 가득히 성에 고인이 없다’ 하며, 또 방 거사가 이르길,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어찌 만물이 위요한데 방해하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민심존경식망泯心存境息妄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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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경계는 없애고 마음은 두는 것이니, 공부를 할 때에 일체 모든 경계를 가져다 공적함을 관하고, 다만 일심만 두어 외로운 표찰과 같이 홀로 설지니, 그러므로 고인이 이르시길, ‘만법으로 벗을 삼지 말며, 제진으로 대하지 말라. 경계에 집착하면 마음이 망령되려니와 이제 경계가 없으니, 무슨 망령된 것이 있겠는가. 참마음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걸림이 없는 것이라’ 곧 고인의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아니한 법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말에 이르길, ‘위의 화원에 꽃이 이미 떨어졌는데 거마가 오히려 아울러 요란하다’ 또 이르길, ‘삼천검객이 이제 어디 있는가? 홀로 장주가 태평을 결정적으로 꾀함이라’ 하니, 이것이 경계를 없애고 마음은 두어 허망을 쉬는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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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는 마음도 없애고 경계도 없애는 것이니, 공부할 때에 먼저 외경이 공적하고 다음에 내심을 멸할지니, 이미 내외심경이 함께 고요하거니, 필경에 망상이 어디로 좇아 있겠는가. 그러므로 관계灌溪께서 이르시길, ‘시방에 벽이 떨어짐이 없고 사면에 문이 없어 깨끗하다. 옷 벗고 옷 벗어 붉은 몸에 물 뿌리고 물 뿌려 씻는 듯하다’ 하니, 곧 조사의 인경人境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말에 이르시길, ‘구름은 흩어지고 물은 흘러가니, 고요히 천지가 비었다’ 하며, 또 이르시길, ‘사람과 소를 함께 보지 못하니, 바로 이 달 밝은 때라’ 하니, 이것은 마음과 경계가 공하여 허망을 쉬는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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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는 마음도 두고 경계도 두는 것이니, 공부를 할 때에 마음은 마음 위치에 머물고 경계는 경계 위치에 머무르니, 어떤 때에 마음과 경계가 서로 대하여도 곧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아니하며 경계가 마음에 다다르지 아니하여 각기 서로 이르지 아니하면 자연히 망념이 나지 아니하고, 도에 걸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길, ‘이 법이 법위에 머물러 세간 현상이 상주라’ 하시니, 곧 조사의 인경人境을 함께 빼앗지 아니하는 법문이니라.이 말은 불생멸법이 제법위에 주하여 만상 체가 다 실상이라. 일체 세간 상이 항상 주하여 나지 아니하고, 항상 주하여 멸하지 아니하나니,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라. 거년에 처마 끝에 달려 있는 고드름이 이제까지 달려 있다 아느냐. 그러므로 이르길, ‘한 조각달이 바다에 나오니 몇 집 사람이 다락에 올랐는가?’ 하며, 또 이르길, ‘산화가 천 줄기라 어떤 자가 돌아갈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이 마음도 두고 경계도 두어 망상을 멸하는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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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는 내외가 온전한 성체이니, 공부를 할 때에 산하대지와 일월성진과 내신외기와 일체제법이 진심의 체와 같아서 담연히 허명하여 일호一毫도 다름없어 대천의 항하사세계를 쳐서 일편을 이루면 다시 어느 곳에 망심을 얻어 오겠는가. 그러므로 조법사가 이르시길, ‘천지가 나로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이 나로 더불어 한 몸이라’ 하니, 이것이 내외전체의 멸망滅妄하는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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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는 내외전용(안팎이 온전한 작용)이니, 공부를 할 때에 일체 내외의 몸과 마음과 세계와 제법과 및 일체 동용시위를 가져 다 진심묘용인 줄로 관할 것이니, 일체 생각이 나는 것이 문득 이 묘용이 현전한 것이니라. 이미 일체가 다 묘용이라면 망심이 어떤 곳을 행하여 집착하겠는가. 그러므로 영가 이르길,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각성이요. 환화공신이 곧 법신’이라 하며, 지공의 십이시가에 이르길, ‘평소의 조인朝寅이여! 광기狂機 내에 도인의 몸이 숨었다. 앉고 눕는데 원래 이 도임을 알지 못하고, 이렇듯이 바삐바삐 신고辛苦를 받는가!’ 하시니, 이것이 안이나 밖이나 온전한 작용이니, 허망을 쉬는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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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는 체에 나아가 곧 작용이니, 공부를 할 때에 비록 진체일미공적眞體一味空寂에 명합冥合하나 그 가운데 안으로 신령하게 밝은 것을 숨겼으니, 이에 체에 나아간 작용이니라. 신령하게 밝은 가운데 안으로 공적함을 숨김이니 작용이 곧 본체니라. 그러므로 영가 이르길, ‘성성적적惺惺寂寂은 옳고, 성성망상惺惺妄想은 그르며, 적적성성은 옳고 적적무기寂寂無記는 그르다’ 하였으니, 이미 적적한 가운데에 무기를 용납하지 못하고, 성성한 가운데 산란을 쓰지 아니하면 있는바 망상이 어찌 나겠는가. 이것이 체에 나아간 작용이니, 허망을 멸하는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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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는 체용 밖에 뛰어나는 것이니, 공부를 할 때에 내외를 나누지 아니하고, 또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아니하여 사방팔면을 가져 일개 대해탈문은 원만하고 아름다운(궁굴궁굴한) 경지를 지어 체용을 나누지 아니하여 터럭 끝도 셈(삼루함)이 없어 온몸이 한 조각(일편)을 이루면 그 망상이 어디로 좇아 일어나겠는가. 고인이 이르길, ‘온몸이 잡아매어 틈(터짐)이 없다. 상하가 튼실하여 둥글둥글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체용에 투출하니, 허망을 멸하는 공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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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열 가지 공부하는 방법은 다 쓸 것이 아니라 다만 한 가지만 가져 공부를 성취하면 그 망상이 스스로 멸하고 참마음이 곧 나타나리니, 근기를 따라 익힐지니라. 일찍이 어떤 법에 인연이 있을는지 곧 하여금 익힐지니라. 이 공부는 무공無功의 공功이요, 유심공력이 아니니라. 이러한 망심을 쉬는 법문이 긴요한 연고로 치우쳐 많이 말하노니, 글이 번거롭다고 말지니라.”
혹 말하길, “앞에서 망심 쉼을 말하였는데,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앉아서만 익히는 것입니까? 행주좌와에 통하는 것입니까?” 답하길, “경론에 앉아 익히는 것을 많이 말하시는 것은 쉽게 이루게 한 연고요, 또 행주좌와에 공부가 간단間斷이 없는 것은 오래오래 하여 점점 순숙한 연고니라. 『기신론』에 이르시길, ‘만일 지관을 닦으려면 고요한 곳에 주하여 단좌하고 정의하여 기식氣息에도 의지하지 말며, 형색에도 의지하지 말고, 공에도 의지하지 말고, 지수화풍에도 의지하지 말며, 내지 견문각지에도 의지하지 말고, 일체 모든 생각생각을 따라 다 제거함에 또한 제거하는 생각도 버릴지니, 그러므로 일체법이 본래 생각이 없을 것이다. 생각생각이 나지 아니하며, 생각생각이 멸하지 아니하나니, 또한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생각한 연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하지 말지어다. 마음이 만일 달려 흩어지거든 곧 마땅히 거두어 정념에 머물지어다. 이 정념이라는 것은 마땅히 오직 마음이다. 외경계가 아니니, 곧 다시 이 마음이 또한 내외형상이 없어 염념을 가히 얻지 못할지니라. 만일 앉고 일어나며, 가고오며, 나아가고 그치며 베푼 바가 있을 때라든지 일체시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하여 관찰해서 오래 익히어 순숙하면 그 마음이 안주함을 얻을지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머문 연고로 점점 맹렬하고 수순하여 진여삼매에 들어가 깊이 번뇌를 조복 받으며, 신심이 증장하여 속히 불퇴전을 이루리니, 오직 의혹과 믿지만 아니할 뿐이니라. 비방하는 중죄업장과 아만해태를 제거함이니, 이와 같은 사람들은 능히 들어가지 못할 바라’ 하시니, 이것을 의지하면 행주좌와에 회통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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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경』에 이르시길, ‘먼저 대각의 사마타행을 의지하여 굳게 계행을 갖추어 여러 대중에 안처하며, 고요한 집에 평안히 앉아 마음을 닦으라’ 하시니, 이것은 처음에 익히는 것이요, 영가 이르길, ‘행하여도 선이요, 앉아도 선이다. 어묵동정에 마음의 체가 평안하다’ 하니, 이것을 의지컨대 또한 행주좌와에 통한다. 총히 공력을 의론컨대 앉아도 오히려 능히 마음을 쉬지 못하거니, 하물며 행주좌와에 능히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만일 공부가 순숙한 사람이라면 일천 성현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만반마군이가 아름답게 하여도 돌아보지 아니하거든 어찌 행주좌와 중에 공부를 하지 못하겠는가. 사람이 사람에게 원수를 갚고자 한다면 내지 행주좌와 일체 처소와 일체 시간에 능히 잃지 못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 유심 중에 일도 오히려 그렇거든 하물며 공부를 짓는 것이겠는가. 만일 믿으면 행주좌와에 도를 반드시 잃지 아니하리라.”
혹 말하길, “망심을 쉬면 진심이 나타난다니, 그렇다면 진심체용이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길, “진심묘체가 일체처소에 두루함이니, 그러므로 영가 이르시길, ‘당처를 떠나지 아니하여 항상 담연하나 찾으면 알겠지만 그대가 가히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경에 이르시길, ‘허공의 성품인 연고며, 항상 동하지 아니한 연고며 여래장 중에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라’ 하며, 대법안이 이르시길, ‘처처가 정각(菩提)의 길이요, 두두물물이 공덕의 총림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이 마음의 체가 있는 것이니라. 참마음의 미묘한 작용은 감을 따라 나타남이 산골짜기 소리를 응하여 메아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법등이 이르시길, ‘고금에 마땅히 떨어짐이 없어 분명히 목전에 있다. 조각구름은 늦은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려옴이라’ 하니, 그런 까닭으로 위부원로화엄이 이르시길, ‘각법이 일체 처소에 있고, 행주좌와의 처소에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하고 서로 묻는 곳에 있으며, 짓고 행위하는 처소에 있다’고 하니, 마음을 들어 생각을 동하면 또 옳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알라. 마음의 본체가 일체 처소에 두루하여 다 능히 작용을 일으키나니, 다만 인연의 유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유도 또한 일정하지 않거니와 묘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 닦는 사람은 하염없는 바다에 들어가 모든 생사를 건너려고 한다면 진심체용의 있는 것을 미혹하지 말지어다.”
혹 말하길, “일찍이 들으니,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여읜다고 하나, 그러나 옛날 해석에 모든 조사가 다 생사가 있으며, 현재의 세간에 무수한 도인을 보더라도 생사가 있으니, 어찌 생사에 벗어났다고 하겠습니까?” 대답하여 말하길, “생사가 본래 없거늘 망령되이 있음을 헤아리느니라. 저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 가운데 꽃을 보거든 눈병 없는 사람이 공화 없음을 말함에 병자가 불신하다가 눈병이 만일 없으면 허공에 꽃이 스스로 멸하여야만 바야흐로 꽃 없음을 믿나니, 다만 꽃이 멸하지 아니할 때라도 그 꽃이 없느니라. 다만 병자가 망령되이 집착할지언정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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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망령되이 생사 있음을 집착하거든 혹 생사 없는 사람이 알리어 이르길, ‘본래 생사 없다 하여도 저 사람이 불신하다가 일조一朝에 망념이 쉬고 생사가 스스로 제거되어야 바야흐로 생사가 본래 없음을 알지니라. 그러나 다만 생사를 쉬지 못할 때에도 또한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애써 망령되이 생사 있음을 그릇 아는 연고로 경에 이르시길,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좇아옴으로 종종으로 전도함이 마치 미혹한 사람이 사방의 처소를 바꾸어서 망령되이 사대를 그릇 알아 자신의 모양을 삼으며 육진 인연의 영역으로 자심自心의 모양을 삼나니, 비유컨대 저 병든 눈이 허공 가운데 꽃을 보는 것이라’고 하니라’ 하시므로 내지 모든 공화가 허공에서 멸함에 가히 정말로 멸한 곳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어떠한 까닭인가? 나는 곳이 없는 까닭이니라. 일체중생이 저 무생 중에 망령되이 생명을 보느니라. 이 때문에 이름을 생사에 윤전함이라 하시니, 이 경문을 의거하면 원각진심을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는 것을 믿어 알지니라. 이제 생사가 없는 것을 알지만 능히 생사를 해탈치 못한 것은 공부를 이르지 못한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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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불교 중에 암바녀가 문수에게 묻길, ‘밝게 생사가 이 생사 아닌 법을 알았지만 어찌하여 생사에 유전함을 입었습니까?’ 문수 대답하길, ‘그 힘이 충분치 못한 연고라’ 하시며, 뒤에 진산주가 있어 수산주에게 묻길, ‘밝게 나는 것이니, 아니 나는 법인 줄을 알았으나 어찌하여 도리어 생사에 유전함을 입습니까?’ 수산주가 이르길, ‘죽순이 필경에 굳은 대가 되는 것이나 지금에는 곧 떼배를 지어 부릴 수 없나니, 그러므로 생사 없는 것을 아는 것이 생사 없는 것을 체달한 것만 같지 못하며, 생사 없는 것을 체달하였을지라도 생사 없는 것에 계합한 것만 같지 못하고, 생사 없는 데 계합하였을지라도 생사 없는 것을 쓰는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이제 사람들은 오히려 생사 없는 것을 알지도 못하거든 하물며 생사 없음을 체달하며 생사 없음에 계합하며 생사 없음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착認著(그릇 알아 집착)하는 자는 생사 없는 법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또한 당연치 아니하니라.”
혹 이르길, “망심을 쉬면 진심이 나타나려니와 아직 망심을 쉬지 못할 때에는 다만 무심 공부만 짓습니까? 다시 별법이 있어서 모든 망상을 대치합니까?” 답하길, “정正과 조助가 같지 아니하니, 망심을 쉬는 것으로 정을 삼고, 모든 착한 것을 익힌 것으로 돕는 것을 삼느니라.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진구塵垢가 덮였거든 비록 손으로써 닦으나 묘한 약으로 닦아야 광채가 비로소 나타나리라. 진구는 번뇌에 비유하고 손으로 닦는 것은 무심 공부에 비유하고 약으로 마련하는 것은 모든 착한 것을 닦는 데 비유함이요, 거울의 광명은 진심에 비유하느니라. 『기신론』에 이르시길, ‘다시 믿음을 성취하여 발심하는 자는 어떤 마음들을 발하는 것인가? 간략히 세 가지 마음이 있으니,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정직하게 진여의 법을 생각한 연고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일체 선행을 모은 연고요, 셋째는 대비심이니 일체중생의 고통을 빼내어주는 연고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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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 말하길, “위에서 법계가 한 모양임을 말하였다. 각의 체성이 둘이 없거늘 어떤 연고로 오직 진여 법(진심)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가자하여 배우기를 구하는가?” 답하길, “비유컨대 큰 마니보배가 체성이 명정하나 광석의 더러운 때가 있으니, 만일 사람이 비록 보배 성품을 생각하나 여러 방편으로 갈고 닦지 않는다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법은 그 체성이 공하고 청정하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에 물들어 있으니,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방편으로써 가지가지로 훈습하지 아니하면 또한 청정함을 얻지 못하나니, 그래서 때가 한량이 없어 일체 제법에 두루하니라. 그러므로 일체 선행을 닦은 것으로서 대치하나니, 만일 사람이 일체 선법을 수행하면 자연히 진여법에 귀순한 연고라고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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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론한 바를 의거하자면 망심을 쉬는 것으로 바름을 삼고 모든 선법을 닦는 것으로 도움을 삼았다. 만일 선을 닦는 때이거든 무심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여 인과를 취하여 집착하지 말지니, 만일 인과를 취한다면 문득 범부 인천의 과보에 떨어져 진여를 증득하기 어렵기에 생사를 해탈치 못하느니라. 만일 무심으로 더불어 서로 응한다면 이것은 진여를 증득하는 방편이며, 생사를 해탈하는 요긴한 기술법이라 겸하여 광대한 복덕을 얻느니라. 『금강반야경』에 이르시길, ‘수보리여! 정사正士가 무주상보시하면 그 복덕을 가히 사량치 못하리라’고 하셨다. 이제 세상 사람에 철학하는 자들을 보니, 겨우 본래 각성이 있음을 알면 문득 스스로 친절을 믿어 모든 착함을 익히지 아니하나 어찌 다만 진심만 통달치 못할 뿐이겠는가. 또한 이에 번득여 해태를 이룰지니 악도도 오히려 능히 못하거든 하물며 생사를 해탈하겠는가. 이 소견이 크게 어긋남이니라.”
혹 이르길, “유심으로 인을 닦는 것은 공덕이 있으려니와 무심으로 닦는 것은 공덕이 어디에서 옵니까?” 답하길, “유심으로 닦는 것은 유위의 과보를 얻고 무심으로 닦는 것은 본성공덕이 나타나느니라. 이 모든 공덕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졌으나 망심이 덮이어 나타나지 아니함이니, 이제 망심을 제거하면 공덕이 스스로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영가 이르시길, ‘삼신과 사지가 체중에 뚜렷함이요, 팔해탈과 육신통이 심지에 날인함이라’ 하시니, 이내 이것이 체중에 스스로 본성공덕을 갖춘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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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게송에 이르되, ‘만일 사람이 고요히 앉기를 한 순간이라도 하면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이 칠보탑 짓는 것보다 수승하다’ 하시니, 그런고로 무심의 공력이 유심의 공력보다 크니라. 홍주 수료 화상이 마조께 참례할 적에 서쪽으로 오신 적적한 달마 조사의 뜻을 묻다가 마조에게 한 번 밟히어 꺼꾸러졌다가 홀연히 깨달아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크게 웃어 말하길, ‘또한 기특하고 또한 기특하다. 백천삼매와 무량묘의를 한 터럭 끝을 행하여 문득 근원을 알았다’ 하시고, 예배하고 물러가시니, 이것을 의거하면 공덕이 밖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저절로 구족함이로다. 사조께서 나융 선사에게 이르시길, ‘대저 백천 법문이 한 가지 방촌으로 돌아가고 항하사 공덕이 다 심원에 있도다. 일체 계문과 정문과 혜문과 신통변화가 다 스스로 구족하여 너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함이라’ 하시니, 조사의 말씀을 의거한다면 무심의 공덕이 가장 크지마는 다만 사상의 공덕을 집착하는 자는 저 무심의 공덕을 믿지 아니하느니라.”
혹 말하길, “진심이 나타나면 어떻게 이 진심이 성숙해서 무애함을 알게 됩니까?” 답하길,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마음이 나타남을 얻을 때에 다만 습기가 다하지 못하면 만일 익힌 경계를 만날 적에 어떤 때는 생각을 잊어버리나니, 소 먹이는 사람이 비록 조복 받았으나 오히려 고삐와 채찍을 놓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마음이 조복되고 걸음이 온당해야만이 곡식밭으로 쫓아 들여보내어도 곡식을 상하지 아니하여 바야흐로 감히 손을 놓아 버릴지니라. 이런 경지를 걸어서 이르러야 도인이 진심을 얻은 후에 먼저 공력을 써 안보하여 양육함을 써 크게 힘을 씀이 있어야 바야흐로 가히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 만일 참마음을 증험할 때에 먼저 평생에 미워하고 사랑한 경계를 가졌을 때에 면전에 생각하여 두되 이전과 같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도심이 순숙하지 못할 것이요, 만일 증애심을 내지 아니하면 이는 도심이 순숙함이니라. 비록 그렇게 이처럼 순숙할지라도 오히려 자연히 증애를 아니 일으킨 것은 아니니, 또다시 마음을 증험할지어다. 만일 증애의 경계를 만날 때에 특히 증애심이 일어나 하여금 증애의 경계를 취하려고 해도 만일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이 마음이 걸림 없는 것이 드러난 땅에 백우와 같아야 곡식의 싹을 상하지 아니하느니라. 옛 사람이 각을 꾸짖고 조사를 꾸짖는 자는 이 마음으로 더불어 상응할 것이니, 이제 사람을 보니 겨우 조종 문하에 들어옴에 도의 근원은 알지 못하고 문득 각과 조사를 꾸짖는 것만 배우니, 너무 일찍이 꾀하는 것이로다.”
혹 말하길, “진심과 망심이 경계에 대할 때에 어떻게 진망을 가립니까?” 답하길, “망심이 경계를 대하는 알음알이가 있어서 아는 것이다. 역순 경계에 탐진치심이 일어나나니, 이미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난다면 족히 망심을 보겠다. 조사 이르시길, ‘역순이 서로 싸우는 것이 마음에 병이라’ 하시니, 그러므로 시비의 경계를 대하는 것이 이 망심이니, 만일 진심이라면 앎이 없이 아는 것이다. 평소 생각이 뚜렷이 비추기 때문에 초목과 다르고, 증애심이 없기 때문에 망심과 다르니, 경계를 대하여 비고 밝아 증애가 없으며, 앎이 없이 아는 자가 이 진심이다. 『조론』에 이르시길, ‘대저 성인의 마음은 미묘하여 형상이 없기에 가히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씀에 더욱 부지런하기에 가히 없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되 앎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이 없되 아는 것이다. 이로써 앎이 없이 곧 알기에 애써 말함에 성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하시고, ‘또 망심은 유에 있으면 유에 집착하고 무에 있으면 무에 집착하여 항상 두 가지에 있기 때문에 중도를 알지 못한다’ 하시며, 영가 이르시길,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면 취사심이 공교하고 거짓됨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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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이 알지 못하여 도적을 그릇 알아 자식을 삼는다 하니, 만일 진심이면 유무에 있어서 유무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상 중도에 거처하니라. 그러므로 조사 이르시길, ‘인연을 좇지 말며 공에도 머물지 말지어다. 한 가지 평소 생각하면 민연泯然히 스스로 다하리라’ 하며, 『조론』에 이르길, ‘이로써 성인은 유에 처하여도 유가 아니요, 무에 거처해도 무가 아니다. 비록 유무를 취하지 아니하나 그러나 유무를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광동진하여 오취에 두루 선회하나 고요히 가고 홀연히 오나니, 편안하고 맑아 함이 없되 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시니, 성인이 사람을 위해서 두루 오취에 선회하시어 중생을 제접하여 교화하시니, 비록 왕래하나 왕래함이 없으시다. 망심은 그렇지 아니하기 때문에 진과 망이 다르다. 또 진심은 평상심이요, 망심은 불평상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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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말하길, “어떤 것이 평상심입니까?” 답하길, “사람마다 일점의 영명함을 갖추고 있어 맑기가 허공과 같아서 일체 처소에 두루하나니, 세속의 일을 대해서는 거짓 이름을 이성理性이라고 하고, 망식심을 대해서는 방편으로 이름을 진심이라 하니라. 털끝만치라도 분별이 없어 인연을 만나도 매하지 아니하고 일념이라도 취사가 없어 물건을 닿음에 다 두루하나 만경을 좇아 옮아가지 아니하니라. 설사 흐름을 따라 현묘함을 얻을지라도 당처를 여의지 아니하여 항상 담연하다. 찾으면 알지니라. 그대가 가히 보지 못하리니 이것이 진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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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말하길, “어찌 이름을 불평상심이라 합니까?” 답하길, “경계에 성인과 범부가 있고, 경계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으며, 경계에 단멸과 상주가 있고, 경계에 원리와 현상이 있으며, 경계에 생겨남과 소멸함이 있고, 경계에 준동과 적정이 있으며, 경계에 감과 옴이 있고, 경계에 좋음과 추함이 있으며, 경계에 착함과 악함이 있고, 경계에 원인과 결과가 있나니, 만일 자세히 의론한다면 만별천차이거니와 다 불평등심이니라. 진심은 본연하여 불평상심의 경계에 갖가지 차별심을 일으키지 아니한 까닭에 이름이 평상진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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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말하길, “진심이 평상하여 모든 다른 인유가 없다면 어찌 각께서 인과선악보응을 말씀하셨습니까?” 답하길, “망심이 갖가지 경계를 좇아 나되 갖가지 경계를 요달치 못하므로 갖가지 마음을 일으킴에 각께서 갖가지 인과를 말씀하시어 갖가지 망심을 다스려 조복 받으려고 하시어 인과법을 세우셨다. 진심은 갖가지 경계를 좇지 아니하며 갖가지 마음을 내지 아니함에 각께서 갖가지 법을 설하지 아니하시니, 어찌 인과가 있겠는가.” 혹 이르길, “진심은 평상하여 나지 아니합니까?” 답하길, “진심의 작용을 베푸는 것이 경계를 좇아 나지 아니하나 다만 묘용으로 유희하여 인과를 매하지 아니하니라.”평상이라 하는 말은, 평은 고하가 없다는 말이요, 상은 간단이 없단 말이니라.
혹 말하길, “참마음을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진심을 미혹하였기 때문에 선악의 업을 짓나니, 선인을 짓기 때문에 선도 가운데에 나고, 악인을 짓기 때문에 악도 중에 들어감에 업을 좇아 수행하는 이치를 의심할 것이 없거니와 만일 진심을 통달한 사람이라면 망정이 쉬어 다하여 참마음에 계합하면 선악의 요인이 없을 것입니다. 한 신령한 몸이 죽은 후에 어디에 의탁합니까?” 답하길, “의탁이 있는 것이 의탁이 없는 것보다 수승하다고 말하지 말고, 또 의탁이 없는 것이 표령탕자(몰락한 방탕아)와 같다고 말하지 말며, 귀취에 무주고혼과 같다고 말라. 특별히 이것을 묻는 것은 의탁이 있음을 구하는가?” 혹 말하길, “네, 그렇습니다.” 답하길, “본성의 이치를 요달하면 그렇지 않거니와 일체중생은 각성을 미혹하였기 때문에 망정을 사랑하는 생각을 내어 업을 맺어 인이 되었기에 육취 가운데에 나서 선악업보를 발한 것이니라. 가령 하늘에 태어날 업이 되면 다만 하늘에 가서 나는 과보를 얻는 것이니, 합당히 나는 곳을 제하여 놓고는 아울러 다른 것은 수용하지 못하나니, 제취의 중생도 다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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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업을 좇기 때문에 합당히 나는 곳으로 낙을 삼고 나지 아니한 곳으로 낙을 삼지 아니하며, 합당히 나는 곳으로 자기의 의탁함을 삼고 나지 아니한 곳으로 타인의 의탁함을 삼기 때문에 망정이 있으면 망령된 인이 있고, 망인이 있으면 망과가 있고, 망과가 있으면 의탁이 있고, 의탁이 있으면 피차가 나뉘고 피차가 나뉘면 옳고 그른 것이 있거니와 이제 진심을 통달함은 생멸이 없는 각성에 계합하여 생멸이 없는 묘용을 일으키나니, 묘체는 참으로 항상하니라. 본래 생멸이 없으며 묘용은 연을 따르기에 생멸이 있는 듯하니라. 그러나 체를 좇아 용이 일어나기에 용이 곧 체여서 어찌 생멸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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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습성으로써 체가 되고 파랑으로써 용이 되느니라. 습성은 원래 생멸이 없으니 파도 가운데 습성인들 어찌 생멸이 있겠는가! 그러나 파도는 젖는 성품을 떠나고는 별도로 없기 때문에 파도도 또한 생멸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고인이 이르시길, ‘온 대지가 이 사문의 일척정안이요, 온 대지가 이러한 가람이라 하니, 이 이치를 깨친 사람의 안신입명安身立命할 처소니라. 이미 진심을 통달하였다면 사생육취가 일시에 녹아지고 산하대지가 다 이 진심이니, 가히 이 진심을 떠난 밖에는 별도로 의탁할 곳이 없다. 이미 삼계에 수생할 망인이 없다면 반드시 육취에 망령된 과보가 없을지니라. 이미 없다면 무슨 의탁할 것을 말하겠는가. 별도로 피차가 없으니 피차가 없는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있겠는가. 곧 시방세계가 오직 참마음 전신이 수용함이니라. 별도로 의탁할 것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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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사에 자유를 얻어 뜻대로 나타내는 문에 뜻을 좇아 마음대로 왕래하면서 조금도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전등록』의 온조 상서가 규봉에게 묻길, ‘본성의 성리를 깨친 사람은 한 목숨을 마침에 어느 곳에다가 의탁하는가?’ 규봉이 답하길, ‘일체중생이 영명각성을 갖추지 아니함이 없다. 대각으로 더불어 다름이 없으니, 만일 능히 참된 성품을 깨치면 본래 나는 것이 없거니, 무슨 의탁할 것이 있겠는가. 영명불매靈明不昧함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하여 좇아오는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으니, 다만 공적으로써 자체를 삼아 이 육체의 몸에 그릇 집착하지 말며, 다만 영지靈知로써 자심을 삼고, 망심을 그릇 집착하지 말라. 망념이 만일 일어나거든 모두 따르지 아니하면 임종명시에 자연히 없이 능히 얽어매지 못할지니라. 비록 중음신이 있을지라도 행하는 바가 자유자재하여 천상과 인간에 뜻대로 좇아 붙어 의탁함이라’ 하니, 이것이 이 참마음이 이 몸을 버린 뒤에 자유로이 가느니라.”
공부를 짓되 최초에 이렇게 생사심 파하기를 요구할지니, 굳게 세계와 몸과 마음이 다 이 거짓 인연이니라. 실로 주재자가 없는 것으로 간파看破할지니라. 만일 본래 구족한 크나큰 이치(本具底大理)를 밝히지 못하면 생사심이 파하지 못할 것이요, 생사심이 이미 파하지 못한다면 무상살귀가 염념이 머무나니, 도리어 저 어떻게 배척하여 보낼 것인가? 이 일념을 가져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기왓장을 짓되 맹렬한 불꽃 가운데 앉아 있어 나오기를 구하는 것과 상사하여 일보를 어지러이 행하려고 해도 얻지 못하며, 일보를 멈추려 해도 얻을 수 없으며, 별도로 일념을 내려 해도 얻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구하여 주기를 바라지만 얻을 수 없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다만 맹화를 돌아보지 말며, 잠깐 그치기를 즐거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바로 달아나되 달아나 벗어남을 얻어야 이 좋은 수단이니라.
공부를 짓되 그 귀한 것이 의정을 일으키는 데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가? 저 태어남에 어디로 옴을 알지 못한다면 온 곳을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고, 죽음에 어디로 감을 모른다면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을지니라. 생사관을 타파하지 못하면 의정이 몰록 발하리니, 눈썹 위에 맺어 두어공부 일념이 간단없이 된다는 말 놓아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으며, 쫓으려 해도 쫓을 수 없어 홀연히 하루아침에 의단을 타파하면 나고 죽는 것이 이 무엇인가 부질없는 것이니라. 악!
공부를 짓되 가장 고요한 경계에 탐착함을 두려워할지니, 사람으로 하여금 고적枯寂한 데 피곤(困)하게 하지만 깨닫지 못하니라. 분주한 경계는 사람마다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람마다 좋아하는 경계는 진실로 수행하는 사람이 일행이 분주한 곳에 있다가 한번 고요한 경계로 상응하면 엿과 꿀을 먹는 것과 같이 탐착하느니라. 사람이 피곤함에 졸음에 취하여 잠자기 좋아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공부를 짓는 사람은 머리를 들지만 하늘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니라.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행하여도 행함을 알지 못하고, 앉아도 앉음을 알지 못하니라. 천 인과 만 인 가운데라도 한 사람도 있음을 봄이 없어 온 몸뚱이 내외가 다만 한낱 의단이니, 의단을 파하지 아니하면 맹세코 쉬지 말라. 이것이 공부에 긴요하니라.
공부를 짓되 죽어서 살지 못할까 두려워 말고, 단지 살아서 죽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니, 과연 의정으로 더불어 한 곳에 맺어 두었는가? 동하는 경계는 보내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가고, 망상심은 깨끗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청정해지리라. 육근문두가 자연히 텅 비어 넓은 지경에 점착하면 도달하고 부르면 대답하거니 어찌 살지 못할까 근심할 것인가?
공부를 짓되 화두를 들거든 역력히 하고 명명히 함에 고양이 쥐 잡는 것과 상사하게 할지니, 옛적에 이른바 살고양이를 베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 아니한다고 하였느니라.살고양이는 사견심과 도회심에 비유함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귀신의 소굴 속에 앉아 있어서 어둡고 침침한 데 일생을 지내리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적에 두 눈을 부릅떠 노리고 네 다리를 딱 버텨서 다만 쥐를 이끌어 입에 이르게 하여야 옳다. 비록 닭과 개가 곁에 있더라도 또한 돌아볼 여가가 없으니, 참선자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야 하니라. 다만 분발하여 이 이치를 밝히기를 요구할지니, 비록 팔풍의 경계가 앞에서 서로 어기더라도 또한 돌아볼 여가가 없느니라. 비록 다른 생각이 있으면 다만 쥐뿐만 아니라 고양이까지라도 잊어버려라.
공부를 짓되 가히 고인의 공안 상에서 헤아려서 허망하게 해석을 더하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긴요함을 간략히 초과할지라도 자기로 더불어 교섭하지 말라. 특히 알지 못하는가? 고인의 한 말씀이 큰 불과 같아서 가까이할 수도 없고, 그것을 닿을 수도 없는 것인데 어찌 하물며 그 불 가운데 앉고 눕겠는가? 또다시 그 가운데 대소를 나누며 상하를 의론한다면 신명을 상실하지 아니할 자가 거의 드물지니라.
공부를 짓되 비교하여 헤아림을 가장 꺼릴지니, 마음을 가지고 주박湊泊하면 도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니라. 아일다가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하여도 반드시 교섭이 없으리라. 만일 의정이 몰록 발하는 사람이라면 은산철벽 가운데 앉아서 다만 요컨대 하나의 살아 나갈 길을 구할지니, 만일 하나의 살 길을 얻지 못하면 어찌 평안히 지내겠는가. 다만 이렇듯 공부만 지어 가면 시절이 오는 때에 스스로 깨치리라.
황벽 선사가 이르시길, “진노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예사 일이 아니니, 굳게 식심(識心頭 : 노끈)을 잡아 한 마당을 지을지니라. 이 한 번 뒤쳐 차가운 것이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의 향기가 코에 다다름을 얻을 것인가!”라고 하니, 이 말이 가장 친절한 것이니라. 만일 이 글귀를 가져 때때로 경책하면 공부가 자연히 상승함을 얻을 것이니라.
공부를 짓되 가장 요긴한 것이 이 하나의 간절하다는 글자이니, 간절함의 한 글자가 가장 유력하니라.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해태심이 나고 해태심이 나면 방종한 뜻이 이르지 아니함이 없을지니라. 만일 마음이 참으로 간절하면 방일과 해태가 무엇을 말미암아 나겠는가. 마땅히 알라. 간절한 한 글자가 고인의 깨친 지경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하지 말며, 생사를 파하지 못할까 근심하지 말지니라.
간절함의 한 단어는 당장에 착한 것과 악한 것과 흐리멍덩한 것과 이 세 가지 성품에서 뛰쳐나오는 것이니, 작용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면 선도 생각할 수 없으며, 작용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악도 생각할 수 없고, 작용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흐린 성품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화두에 간절하면 산란심이 없고 화두에 간절하면 혼침이 없느니라.
공부를 짓되 가장 두려운 것은 사유해서 시를 짓고 게송을 지으며, 작문과 부賦 짓는 것들을 꺼릴지니, 시나 게송을 일삼으면 이름을 시하는 승려라 하고, 문文과 부 짓기를 힘쓰면 문자승이라고 하느니라. 참선으로 더불어 총히 교섭이 없다. 무릇 역경계든지 순경계든지 사람의 생각을 동할 곳을 만나거든 문득 깨달아 화두만 잡아 들어 모든 경계를 쫓아 반연하여 굴리지 않아야 비로소 옳다. 혹 말하길 긴히 할 것이 없다 하나니, 이 세 개의 글자가 가장 사람을 그르치리라. 학자는 불가불 살펴야 할지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지니라. 저 사람이 길을 감에 길 위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도달하기만 기다린다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함이니, 다만 가야만이 집에 이르는 것이요, 만일 마음을 가져 깨치기를 기다린다면 마침내 깨치지 못하는 것이니, 다만 핍박하여야 깨치리라. 깨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공부를 짓되 하나의 실 터럭만큼이라도 딴 생각을 두지 말지니, 행주좌와에 오직 홀로 다만 본래 참구하던 화두를 잡아 들어 의정을 발기하고 분발하여 하나에 그치는 곳을 찾기를 요구할지니라. 만일 실 터럭만큼이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바 모든 독기가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을 상한다 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아니하지 못할지니라.
내가 이르길, 딴 생각은 비단 세간 법뿐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밖에는 불법 중에 일체 좋은 일이라도 다 이름이 딴 생각이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 중의 일뿐이겠는가? 내 마음의 본체 위에라도 그것을 취하고 그것을 버리며, 그것을 집착하고 그것을 변화시킴이 다 딴 생각이니라.
공부를 짓되 가장 두려워할 것은 하나의 영리한 마음이니, 영리한 마음은 그 약에 상극이 되느니라. 터럭만큼이라도 범하면 비록 참 약이 현전하여도 능히 구원하지 못할지니라. 만일 진실로 이 하나의 참선한 자라면 눈이 맹인 같고 귀가 먹은 것과 같으며, 심념이 겨우 일어날 때에 은산철벽을 맞부딪침과 같으리니, 이와 같다면 공부에 비로소 상응할 수 있을지니라.
공부를 짓되 가히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향함에 눈을 질근 감고 귀신의 굴속에 앉아 있어 살길을 꾀하려 하지 말지니라. 고인이 말하길, “흑산 아래에 앉으니 죽은 물이 침범하였다.”라고 하니, 무슨 일을 마치겠는가. 다만 경계의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 가야 비로소 힘을 얻으리라. 일구의 화두를 몰록 일으켜 눈썹 위에 두어 다니는 속과 앉은 속과 옷 입고 밥 먹는 속과 손님을 맞이하고 빈객을 보내는 속에 다만 이 일구 화두의 낙처를 밝힐지니, 하루아침에 낯을 씻을 때에 콧구멍을 만지면 원래로 가장 가까우니라.눈썹에 둔단 말은 항상 잊지 아니한단 말
공부를 짓되 다만 일칙一則의 공안 상에 있어 마음을 쓸지언정 일체의 공안 상에 알려고 하지 말라. 비록 앎을 얻었을지라도 마침내 이것은 알음알이요, 깨친 것이 아니다. 『법화경』에 말씀하시길, “이 법이 사량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라고 하시고, 『원각경』에 이르시길, “사유하는 마음으로써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린다면 마치 반딧불을 취해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능히 얻지 못한다.”라고 하며, 동산이 이르길, “심의식을 가져 현종을 배우려면 크게 서쪽으로 감에 도리어 동쪽으로 가는 것과 같다.”라고 하시니, 대체로 공안을 천착하는 자는 모름지기 가죽 아래에 피가 있는 자이니(죽어 썩은 놈이 아니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비로소 옳다.
도는 잠깐이라도 여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여의면 도가 아니요, 공부를 잠깐이라도 사이가 끊이지 않을 것이니, 사이가 끊이면 공부가 아니니라. 진정으로 참구하는 사람은 불이 눈썹 위에 타는 것과 같으며, 또 머리에 불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니, 어찌 한가롭게 다른 일을 위해서 생각을 움직이겠는가. 고덕이 이르길, “마치 한 사람이 만인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과 같아서 얼굴을 봄에 어찌 눈을 끔적거리어 봄을 용납하겠는가?”라고 하니, 이 말이 공부하는 데 가장 긴요한 것으로 불가불 알아야 할지니라.
공부를 짓되 거량을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승당하려고 말지니승당함이라 함은 가령 종사가 종승을 거량함에 학자가 내달아 공연히 이것이요 저것이요 대답해서 승당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승당하려고 하면 바로 이른바 미련하고 어리석으니라.만안롱동瞞頇儱侗은 두미頭眉가 없고 방행이 없는 두루뭉술이라 참 어리석다. 참구로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니라. 다만 의정을 발기하여 하여금 승당할 것이 없는 곳에 사무치며, 승당할 것이 없는 데에 사무친다면 공중에 높이 지은 누각이 칠통팔달한 것과 같으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도적을 그릇 알아 자식을 삼은 것이며, 종을 그릇 알아 낭군을 삼는 것이니라. 고덕이 이르길, “나귀 안장 다리를 가지고 부모의 아래턱이라고 불러 짓지 말라.”라고 하시니, 이것을 말하느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해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일 설파해 주더라도 마침내 다른 사람의 것이라 자기는 상관이 없느니라. 사람이 길을 물어 장안에 이르고자 함에 다만 그 길만 가르쳐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을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장안의 일을 낱낱이 설명하더라도 마침내 저 사람이 본 것이요, 길을 묻는 자가 친히 본 것이 아니니라. 만일 힘써 가지 아니하고 문득 다른 사람이 설파하여 준 것만 구함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공부를 짓되 가히 잠깐이라도 정념을 잃지 말지니, 만일 참구하는 한 생각을 잊으면 반드시 이단의 도로 들어가 아득히 돌아오지 못할지니라. 어떤 사람이 고요히 앉아 맑고 맑은 것만 즐겨서 순일하게 청정하여 점에가 끊어진 것으로 각법을 삼나니, 이것은 정념을 잃을 것이라 맑고 맑은 데에 떨어지느니라. 혹 능히 강의도 하고 말도 하고 능히 꿈쩍이고 능히 고요한 것으로 각법을 삼나니, 이것도 정념을 잃은 것이라 신령스러운 알음알이를 그릇 안 것이니라. 혹 망상심을 억지로 막아 눌러 망상심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으로 각법을 삼나니, 이것도 정념을 잃은 것이라 돌로 풀을 누른 듯하느니라. 또 파초의 잎을 벗겨내듯하며 혹 몸이 허공과 같음을 관하여 생각을 아니 일으키는 것이 장벽과 같이 하나니, 이것도 정념을 잃은 것이라 공망에 떨어진 외도며, 혹 흩어지지 아니하고 죽은 사람이라 총괄하여 말하면 다 정념을 잃은 것이니라.
공부를 짓되 의정이 발하여 일어나거든 다시 의정을 타파하기를 요구할지니, 만일 타파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정념을 확실히 하되 큰 용맹심을 발하여 간절한 가운데 또다시 간절함을 더하여야 옳다. 경산이 이르길, “대장부가 결단코 일대사인연을 궁구하고자 한다면 한 지위 낯가죽을 타파하여 성품이 조급히 하여 척량골을 버티어 인정을 수순하지 말라. 평석에 의심난 곳을 가져 이마 위에 붙여 둠에 평소에 타인의 빛이 백만 관이 모자라는 것과 같아서 저 사람의 재촉하는 것을 입어 가히 갚을 수 없는 지경이다. 사람의 치욕을 입을까 두려워하여 급함이 없는데 급하게 하며 바쁨이 없는데 바삐 하며 큼이 없는데 큰 하나의 사건이 있는 것과 같이 하여야 바야흐로 나아갈 분이 있을지니라.”
황벽이 마조를 친견하고자 하여 백장을 하직함에 백장이 말하길, “마조께옵서 이미 열반에 드셨다.” 황벽이 한탄하기를 마지아니하시고 다시 백장에게 여쭙길, “사부께옵서 마조를 친견하심에 무슨 법을 말씀하셨습니까?” 백장이 이르길, “내가 마조 선사를 두 번째 참여할 때에 마조께서 이와 같이 하였다.”라고 하고 문득 벽력같이 호령하니, 황벽이 활연대오하여 혀를 토하니, 이것은 백장의 힘을 얻어 깨친 것인가? 마조의 힘을 얻어 깨친 것인가? 암두께옵서 덕산을 보옵고 물어 말하길, “내가 이 범부인가? 성현인가?” 덕산이 벽력같이 호령하시기에 암두가 문득 예배하시니, 이것은 은혜를 알아서 예배한 것인가? 은혜를 갚으려고 예배한 것인가?88)
암두 전활 선사가 덕산 화상을 뵈올 때에 문에 걸터앉아 묻길, “내가 이 성인인가 이 범부인가?” 덕산이 벽력같이 호령하시니, 암두가 문득 예배하였다. 동산이 이 말을 듣고 찬탄하여 말하길, “만일 암두 전활 상좌가 아니면 크게 승당하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암두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길, “동산 노인이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릇 이름하여 말하였다. 이런 것이 아니라89)
내가 당시에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렸다.”라고 하니, 어떤 속이 이 손 들고 내린 곳인가? 두 어른의 골수를 사무쳐 보면 문득 한 말을 내려 제방의 혀를 끊으리니, 네가 문에 들어옴을 허락하려니와
그 혹 그렇지 못하다면 마땅히 급히 참구할지니라. 만일 참구하고자 한다면 문득 공부를 의론할지니라. 바로 본분을 의지하여 법답게 하여야 옳다. 마땅히 본래 참구하는 공안 위에 의심을 둘 것이니, 크게 의심하는 아래에서 반드시 크게 깨치리라. 천 가지 의심과 만 가지 의심을 아울러 하나의 의심을 지어서 본래 참구하는 공안 위에 판단하기를 취할지니, 만일 언구를 의심하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큰 병이 되느니라.
인하여 다 모든 인연을 놓고 행주좌와 24시 중에 단단히 하나의 화두만 잡아 들어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어다. 만일 좌선하는 중에 득력이 가장 많거든 앉아 마땅히 법만 얻을지언정 똑바로 보아 눈에 힘을 써서 몸과 마음을 막아 억지로 누르지 말지니, 만일 기력을 쓰면 곧 병고를 부르리라. 다만 몸을 단정히 하여 바르게 앉아서 평소대로 눈을 떠서 몸과 마음의 경계를 반드시 돌아보아 집착하지 말지니라.
혹 혼침과 산란이 있거든 조금 정신을 거두어 화두를 한두 번 소리를 잡아 들면 자연히 모든 마가 소멸하리라. 눈이 일정한 것은 마음이 적정한 것이요, 마음이 적정하기에 몸도 적정해서 지은 것이니, 만일 선정을 얻을 때에는 능사로써 삼지 말라. 혹 화두를 잊고 저 공에 잠기고 고요한 데 걸리고 크게 깨치지 못하면 큰 병이 되느니라. 달마 조사가 서쪽으로 오시어 홀로 잡아 들어 바로 가르치심은 크게 깨친 것으로 문에 드는 것을 삼으시고, 선정과 신통은 의론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이 다 끝과 갓의 일이니라. 만일 선정 중에 밝게 깨침을 얻은 자는 지혜가 도리어 광대해서 물과 뭍에 아울러 나아가는 것이니라.
공부가 만일 농후한 하나의 지위와 담담한 하나의 지위에 이르러 아무 재미가 없을 때에 바로 좋게 걸어 나아가야 점차로 절정에 들어가리니, 간절히 놓아 버리지 말라. 성성만 하면 문득 고요한 데 들어갈지니, 고요한 연후에 선정한 것이니, 선정에는 각각 이름이 있어서 바름과 삿됨이 있으니, 마땅히 알지니라. 선정에서 나온 연후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청명하여 일체의 처소에서 힘이 덜어지니, 바로 준동하는 가운데 한 조각을 이루어도 마땅히 자세히 마음을 쓸지니라. 공부에 나아감에 시작할 때나 마칠 때나 깨끗하고 고요한 두 가지를 여의지 말지니, 고요함이 극진하면 문득 깨치는 것이요, 깨끗함이 극진하면 광명이 통달하는 것이니, 기운이 엄숙하고 풍기가 맑아서 동정의 경계가 가을 하늘처럼 맑은 때가 이 공부의 첫째로 표준이 되는 절목이니라. 문득 이러한 지경에 때를 타고 나아가면 맑은 가을에 들판의 물과 같으며, 옛 사당 속의 향로와 같으리니, 고요하고 고요하며 또렷하고 또렷해서 마음이 다니지 아니하는 때에 나의 허환한 몸이 인간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화두만 면밀하고 면밀하게 끊어지지 아니하니라. 이 속에 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광명은 장차 발하리니, 이것이 제2의 표준이 되는 절목이니라. 이때에 만일 깨친 마음을 내면 공부가 순일함을 끊으리니, 크게 해로울 것이다. 이 허물이 없는 자는 동정動靜이 한결같고 오매寤寐가 또렷하고 또렷하여 화두가 현전한 것이 물속에 비추는 달빛의 광명이 여울의 물결 가운데에 있어 활발발하여 닿아도 흩어지지 않고, 동탕하여도 잃지 아니할 때에 중심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며, 밖으로 흔들려도 요동하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제3의 표준이 되는 절목이니라. 의단이 타파되면 정안正眼이 열림이 가까우니, 홀연히 대쪽 맞듯 맷돌 맞듯 하여 계란이 새끼가 생겨나서 어미 닭이 부리로 쪼음에 병아리가 울고 나오는 듯 왕대 마디가 튀듯 해서, 나의 본연한 성품이 환하게 밝아진 신훈 각조覺祖의 본분인이 미워한 곳을 잡아 타파할지니라. 또 마땅히 대종장을 보아 백 번을 단련하여야 대법기 이루기를 구할지언정 조금 얻어 가지고 자족하는 마음을 내지 말지니라. 깨친 뒤에라도 대종장을 보지 못하면 후사를 알지 못하리니 그 해로움이 하나만이 아니니라.
혹 각조覺祖의 근기를 반연한 위에 장애한 곳이 있으면 이것은 깨친 것이 옅어 그러한 것이라 현현하고 미묘한 것을 다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이미 현묘함을 다하였더라도 또한 걸음을 물러나서 이름을 감추고 자체를 숨기어 힘을 온전히 갖추어 대장경과 유서와 도가를 보아 나의 다생에 습기를 녹일지니라. 청정하여 갓이 없으며 뚜렷이 밝아 걸림이 없어야 애초에 가히 높이 날고 멀리 들어 광명이 성대함을 얻어 선대 조사의 종지에 욕되지 아니하리라. 그 혹시 옛 시절을 환기하여 행리를 다하지 못하면 문득 범상한 부류에 떨어지리라. 말할 때는 깨친 듯하나 경계를 대면하면 도리어 미혹하여 말이 술 취한 사람 같아서 세속의 자식을 지으리라. 기틀이 숨고 나타남을 알지 못하고, 말이 삿됨과 바름이 없이 인과를 쓸어 없앤다면 지극히 해가 되느니라.
고인의 그 바름과 삿됨이 크게 표본이 있으니, 일을 마친 자는 생사의 언덕에 능히 거친 것을 바꾸어 미세한 것을 만들며 능히 짧은 것을 바꾸어 긴 것을 만들면서, 지혜 광명의 해탈로써 일체법을 출생하는 삼매왕을 얻으리라. 이러한 삼매이기 때문에 의생신을 얻으며, 그 뒤에는 미묘한 응화신(시방국토에 인연을 쫓아)과 믿음의 몸을 얻나니, 도가 큰 바다 같아야 전전이 들어갈수록 전전이 깊어지리라. 달마가 게송을 두어 이르길, “각의 마음의 종지를 깨치면 똑같아서 차등이 서로 없으나 아는 것과 생이 상응해야만이 이름하여 조사라고 한다.”라고 하시니, 다시 종문 중에 각조를 뛰어넘는 도약이 있다고 말라. 총상인은 믿는가? 믿고 믿지 아니하는 것은 이후에 스스로 알아지리라.
스님은 몽산이 와서 예배함을 보시고 먼저 스스로 묻길, “그대는 도리어 믿는가?” 몽산이 이르길, “만일 믿지 아니하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님께서 이르시길, “충분히 믿더라도 다시 계를 수지하길 요하니, 계를 가져야 영험을 쉽게 얻으리라. 만일 계행이 없으면 공중의 누각과 같으니, 도리어 계를 가지는가?” 몽상이 이르길, “오계는 가졌습니다.” 스님께서 이르시길, “이 뒤에는 다만 하나의 무자만 의심하되 사량하지 말며, 있고 없는 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또한 경전이나 어록이나 그런 것을 보려고도 하지 말며, 다만 오직 무자만 잡아 들되 24시간과 행주좌와 내에 또렷또렷이 해서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며, 닭이 알을 품은 듯 해서 조금도 끊이지 말지니라. 아직 투철하게 깨치지 못하였거든 늙은 쥐가 쌀 궤짝을 쏘는 것과 같이 하여 가히 고쳐서 옮기지 말지니라.(화두 의심하는 모양)
때론 다시 의심을 경책하여 일으키어 이르길, “일체 함령이함령은 중생이다. 다 신령한 각성이 있거늘 조주는 무엇을 인하여 없다고 말하는가?” 뜻은 어떠한가? 이미 의심이 있거든 묵묵히 하나의 무자를 잡아 들어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 다만 이 무無자로 자기 성품을 알기를 요구하며, 조주를 알기를 요구하고, 화문변이 신훈각조가 사람을 얻어 미워하는 곳을 잡아 팸을 요구할지니라. 다만 나의 이러한 말을 믿어 바로 공부를 지어 가면 결정적으로 발명할 시절이 있으리니, 결단코 너를 그르침이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만일 참선하고자 한다면 수많은 말을 할 것이 없으니, 조주무자를 생각생각이 서로 이어져서 행주좌와에 한결같아서 목전에 서로 대한 듯이 매하지 말지니라. 금강과 같은 굳은 뜻을 분발하여 한 생각이 만년 가게 할지어다. 회광반조하여 살피고 다시 관하여 혼침과 산란에 힘을 다하여 채찍을 더할지어다. 천만번 갈고 단련하면 전전이 신선하고 일구월심하면 면밀하고 면밀하게 할지니라. 들지 아니하여도 화두가 저절로 들리는 것이 물이 흘러 쉬지 아니하는 것과 같으며, 마음이 비고 경계가 고요해서 즐겁고 평안하리라. 선악의 마군이 오거든 무서워하지도 말고, 즐거워하지도 말지어다. 마음에 증애심을 내면 정다움을 잃고 전도함을 이루리라. 뜻을 산처럼 굳게 세우고, 마음은 바다처럼 넉넉히 하면 큰 지혜의 해와 같아져야만이 삼천세계에 널리 비추리라. 미혹의 구름이 흩어져 다하면 만 리 청천에 중추의 보배 달이 맑게 사무쳐 그 근원이 맑으리라. 허공에서 불꽃이 발하고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이 맞추듯 하여 거듭 현현한 것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다 꿰며, 제각의 묘리를 두루 원만하게 아니함이 없으리라. 이러한 때에 이르러 일찍이 드높은 현자를 찾아 기미機味를 완전하게 굴려서 바름도 없고 편벽됨도 없이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산림에 들어가 띳집과 흙집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함이 없이 광대하게 하여 성품의 깨끗하기가 흰 연꽃처럼 할지어다. 때가 오거든 산 밖에 나와 바닥없는 배를 타고 반연의 물결을 따라 묘한 것을 얻어 널리 인천을 제도해서 동일하게 정각의 언덕에 올라 동일하게 금선金仙을 증득할지어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소멸하는 그것을 일러 생사라 하는 것이니, 나고 죽는 때를 당해서 힘을 다해서 화두를 잡아들지니라. 화두가 순일하면 일어나고 소멸함이 곧 다하리라.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이 곧 다하는 곳의 그것을 고요함이라 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그것을 일러 무기無記라 하고,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뚜렷뚜렷 매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일러 신령하다 하느니라. 곧 이 공적영지가 무너지지 않고 섞이지도 아니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여러 날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이루리라. 대각기원 2949년(1922) 임술 9월 21일 끝마침
부록附錄
수심정로修心正路
대각교 관정사 백상규 지음
1. 시심마是甚麽 화두話頭에 병을 간택揀擇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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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大抵 마음을 닦는 도인道人들은 먼저 공부工夫길을 자세仔細히 간택揀擇하여 바른 길을 얻어야 헛고생(苦相)을 아니하고 탄탄대로坦坦大路로 걸림 없이 갈 것입니다. 수도인修道人들은 자세히 들어 보시오. 사람사람마다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와 허공을 온통 집어삼키어 있고, 또 가는 티끌 속에도 작아서 차지 아니하오. 밝기는 백천일월百千日月로 견주어 말할 수 없고, 검기는 칠통漆桶으로도 같다 할 수 없습니다. 이 물건物件이 우리의 옷 입고 밥 먹고 잠자는 데 있지만 이름 지을 수 없고 얼굴(모습)을 그려 낼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마음도 아니요 마음 아님도 아니요, 생각生覺도 아니요 생각 아님도 아니요, 각도 아니요 각 아님도 아니요, 하늘도 아니요 하늘 아님도 아니요, 귀신鬼神도 아니요 귀신 아님도 아니요, 허공虛空도 아니요 허공 아님도 아니요, 일물一物도 아니요 일물 아님도 아니니, 그가 종종種種 여러 가지가 아니지만 능히 종종 여러 가지를 건립建立하나니, 지극히 밝으며 지극히 신령神靈하며 지극히 비었으며 지극히 크며 지극히 가늘며 지극히 강强하며 지극히 유柔합니다. 이 물건은 명상名相이 없으며 명상이 아님도 없습니다. 이 물건은 마음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고, 마음이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며, 언설言說로도 지을 수 없으며, 고요하여 말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物件인가? 의심하고 또다시 의심함에 어린아이가 어머니 생각生覺하듯이 간절히 하며 닭이 알을 품고 앉아 그 따뜻함이 끊이지 아니한 것과 같이 하면 참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칠 것입니다. 수도인修道人들은 또다시 나의 말을 들어 보시오. 우리가 공부를 닦는 것은 삼장십이부경전三藏十二部經典에 상관相關이 없고 오직 능인대각能仁大覺이 다자탑전多子塔前에서 반좌半座를 나누시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드시고 사라쌍수간娑羅雙樹間에서 관棺으로 쫓아 두 발을 내어 보이시니, 이것이 전하여 오는 것이 우리가 믿어 행하는 것이오. 출격장부出格丈夫들은 알거든 곧 알 것이지만 모르거든 의심疑心하여 보시오. 사리불舍利弗과 같이 지혜智慧가 있는 사람이 온 세상(世間)에 가득하고 티끌 수와 같지마는 정사라도 조금도 알지 못하며 삼세三世 모든 각도 이 물건을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모든 도인들은 알거든 내어놓으시오. 모르거든 의심하여 보시오. 부디 공부하는 도인들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모든 경계境界를 쫓아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지 마시오. 또 소소영영한 것이 무엇인가 하지 마시라. 또 생각 일어나는 곳을 들여다보지도 마시오. 또 화두할 때에 잘 되고 못 되는 데 이해理解를 취하지도 마시오. 또 고요하고 안락安樂함을 취하지 마시오. 또 공부하다가 마음이 텅 빈 것을 보고 견성見性하였다고 마시오. 이 물건은 천지天地와 허공虛空을 집어삼키고 있는 물건입니다.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이와 같이 의심하시오. 어떤 사람이 묻길, “무슨 인유因由로 보고 듣는 것이 이 무엇인가 하지 말라 하며,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것이 무엇인가 말라 하며, 생각 일어나는 곳을 찾아보지 말라 하는가?” 용성龍城이 대답하길, “육근이 경계를 대함에 그 아는 분별이 나타남이 한정이 없거늘 그 허다한 경계를 쫓아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찾으면 그 마음이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그 화두도 일정一定한 것이 아니요. 그리하다가 혹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아는 것으로 자기自己의 본면목本面目으로 그릇 알기도 쉽다. 그렇지 아니하면 고요한 것으로 자기自己의 본성本性을 삼기도 쉽다. 그렇지 아니하면 공空한 것으로 본성을 그릇 알기도 쉽다. 그렇지 아니하면 말끔한 것으로 자성을 깨쳤다 하기도 쉽다. 마음이 스스로 내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고 아니하거늘 무슨 일로 소소영영하다고 하는가?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서 비추어 보지도 말라. 혹 맑은 생각으로 맑고 맑은 곳을 보아 그곳에 집을 짓고 들어가 앉기도 쉽다. 설혹 일념一念 당처當處가 곧 공함을 깨칠지라도 확철대오確徹大悟가 아니요.” 육조六祖께서 말씀하시길,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 하늘을 버티고 아래로 땅을 고였으며, 밝은 것은 일월日月과 같고 검기는 칠통과 같아서 항상 나의 동정動靜하는 가운데에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라고 하시며, 또 육조께서 회양懷讓을 대하여 물어 말하길, “무슨 물건이 이렇듯이 왔는가?”라고 하시니, 회양懷讓이 알지 못해서 팔년八年을 궁구하다가 확철대오確徹大悟하였으니, 이것이 화두하는 법이다. 이 물건은 육근六根으로 구조構造된 몸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相關이 없이 항상恒常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상관없이 항상 있다. 공空하고 공하지 아니한 것이 상관이 없이 항상 있다. 허공은 없어져도 이 물건은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밝은 것은 무량無量한 일월로 비준할 수 없다. 검은 것은 칠통漆桶으로도 같다 할 수 없다. 참으로 크다. 천지와 세계世界와 허공을 다 삼켜도 삼킨 곳이 없다. 참으로 작은 것이다. 가는 티끌에 들어갔지만 그 티끌 속에도 보이지 아니한다.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단지 의심하여 볼지어다. 추호秋毫라도 달리 아는 마음을 내지 말고, 단지 의심疑心이 큰 불덩어리같이 의심만 할지니라. 단지 은산銀山과 철벽鐵壁같이 해서 발붙이지 못할 곳을 행하여 뚫어 들어가리라. 묻길, “천지허공을 온통 집어먹고 있다 하니, 이것이 나의 본원本源 각성覺性이 아닌가? 나의 참 마음이 아닌가?” 용성이 대답하길, “이것은 네게 지해知解가 아닌가? 네가 참으로 증득證得한 것인가? 비유컨대 어떠한 사람이 서울은 보지 못하고 서울을 본 사람에게 서울의 일을 들어 보았다고 하자. 그 서울을 자세히 본 사람은 서울을 본 말을 자세히 하니, 그 서울을 아니 본 사람이 서울에 남대문이 어떻고 종로가 어떻고 대궐이 어떻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알았다. 그러면 그것이 서울을 친히 본 것이 되는가? 성인聖人의 마음이니 성품이니 말하시니, 그 말만 듣고 그 말만 외우기만 하면 성인이 되는 것인가? 본성이 어느 때에 내가 본성本性이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사람이 명상名相을 지어 마음이다 성품性品이다 여러 가지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명상 짓기 전에는 무슨 물건인가? 네가 궁구窮究하여 실답게 깨치며, 실답게 증득하여야 될 일이 아닌가? 이 일은 말로 지어 꾸미어도 될 수 없고 말이 잠잠하거나 고요한 것으로도 될 수 없고, 있는 마음으로도 될 수 없으며, 없는 마음으로도 될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궁구窮究하여 볼지어다.” 이것은 모든 성현도 알지 못한다고 하거든 너의 아는 것으로 알 수 있는가? 그 의미意味가 깊다. 모든 성인聖人이 참으로 몰라서 모른단 말도 아니요 알아서 아는 것도 아니니, 그대가 이 물건을 아는가? 이것은 물건도 아니니 말로 그려낼 수 없다. 이 물건을 알겠는가. 이것은 그려낼 수도 없다고 하나 깨친 자에게는 분명하다. 비유컨대 저기 철로鐵路가 있소. 철로 위에는 차가 있소. 차에는 화통火桶이 있소. 화통 속에는 석탄石炭과 물이 있어서 물이 자꾸 졸아 간다. 그러나 차가 가지 않소. 어찌 차가 아니 가오. 사람이 기계를 부리지 아니하면 차가 가지 아니하오. 예, 그렇소. 사람이 이 몸을 가지고 동작動作하여 앉고 눕고 다니니, 몸이 능히 동작하는 것이요. 예, 그렇지 않소. 차와 같소. 그러면 무엇이 동작을 하는가요. 그것은 나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당신當身이 당신의 몸을 능히 운동運動시키는 것을 찾아보시오.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의심하여 보시오. 어찌 내가 나를 알지 못하시오. 내가 열성熱性으로 당신에게 권하노니 부디 찾아보시오. 몸은 아침 이슬 같고 목숨은 서쪽에 다 넘어가는 햇빛 같소. 어서 찾아보시오.
2. 화두가 좋은 화두가 있다 함을 간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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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묻길, “화두가 좋은 것이 따로 있다지요?” 용성龍城이 말하길, “그런 말씀 마시오. 화두가 어디 좋은 화두가 따로 있단 말이오?” “내가 시심마是甚麽는 무無자만 못한 줄로 알았소.” 용성이 말하길, “다시 그러한 사견邪見을 내지 마시오. 좋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있고, 화두법에는 없소. 용성이 거금距今 사십 년 전에 선각자를 찾아 도처到處에 다니니, 그 행색行色은 폐의걸식弊衣乞食이 나의 직분에 족한지라. 청천靑天에 나는 학鶴과 같이 백운白雲으로 벗을 삼고 사해四海 팔방八方을 두루 다니니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의 집이었다.” 한 선각자를 친견親見하고 법法을 물었더니 그 선각자가 이르길, “시심마 화두는 사구死句요, 무자 화두는 활구活句라고 하였소.” 용성이 정색正色하며 대답하여 말하길, “감히 명命을 듣지 못하겠소. 그러한 이치理致가 만무萬無하오. 시심마는 사구도 아니요, 활구도 아닌 줄로 압니다. 시심마 화두가 사구로 확정確定될 것 같으면 남악 회양 성인南嶽懷讓聖人이 숭산崇山으로부터 왔거늘 육조 성사六祖聖師께서 물어 말씀하시길, ‘네가 어떤 곳으로 왔는가?’ 회양께서 망지소조罔知所措하여 팔 년八年을 궁구하다가 확철대오하여 육조 성사의 적자嫡子가 되시니, 도道가 천하에 으뜸이었소. 어찌 사구死句에서 깨치시고 활구活句 문중門中에 동량棟樑이 되었겠는가? 시심마가 활구로 확정될 것 같으면 육조 성사께서 어느 날 이르시길,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천지에 기둥(柱)이 되며 밝기는 해와 달과 같이 밝으며 어둡기는 칠통과 같이 검으며 머리와 꼬리, 얼굴이 없지만 우리들이 움직이고 작용하는 가운데에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하시니, 하택 신회荷澤神會가 나이 칠 세라 곧 나와서 정례하고 대답하길, ‘삼세각三世覺의 본원本源이요, 신회神會의 각성覺性입니다.’ 육조 성사께서, ‘네가 종사관宗師冠을 머리에 쓰고 학자學者를 제접提接할지라도 지해知解 종사宗師밖에는 되지 못하리라’ 하시니, 어찌 활구문 중에서 깨치고 사구문 중에서 지해종도가 되겠습니까?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선각자가 말하길, “시심마는 병통이 많다.”라고 하였다. 용성이 말하길, “무슨 말씀입니까?” 선각자가 말하길, “근일近日 깨쳤다는 것이 시심마 화두하는 사람에게 유독唯獨 많다.”라고 하였다. 용성이 말하길, “시심마를 어떻게 알기에 그렇단 말씀입니까?” 선각자가 대답하길,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용성이 말하길, “무엇을 가져 무엇인가 합니까?” 그가 말하길, “혹 소소영영한 것이 무엇인가? 혹 보고 듣는 것이 이 무엇인가? 혹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용성이 대답하길, “가탄可歎 가탄可歎이 이옵니다. 화두를 이와 같이 궁구하거든 어찌 병통이 없겠습니까? 육근문六根門 머리에 아는 빛 그림자가 경계境界를 좇아 감각感覺하는 대로 이것이 무엇인가 하며, 또 뜻 뿌리(의근)에 분별分別하는 그림자를 가지고, 이 무엇인가 하며, 또 생각으로 염念이 일어나는 뿌리(根)를 들여다보며, 이것이 무엇인가 찾으니, 이것으로 좇아 병이 많이 납니다. 이 사람은 공한 병이 아니면 맑은 병이요, 그렇지 않으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것을 지키는 병病이 허다許多합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어찌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증득證得하겠습니까?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가 그 참구參究하는 법은 통틀어 하나이니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시심마는 한 물건을 알지 못해서 참구하는 것이니, 앞에서 이미 말하였기 때문에 그만두리다.”
3. 시심마 화두가 백천百千 화두에 근본根本 된다 함을 간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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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묻길(或이 問曰), “백천 화두가 시심마로 아니 들면 화두가 되지 아니한 줄로 생각生覺합니다.” 용성이 대답하길, “내가 그 말에 의미意味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가 말하길, “이 무엇인가 하지 아니하면 무엇을 가지고 의심하리요. 가령 무자無字 화두話頭라 할지라도 무無가 무엇인가 하든지 무가 무슨 도리道理인가 하든지 그렇게 해야만이 화두가 되지요.” 용성이 묻길, “누가 화두를 그 모양模樣으로 가르치던가?” “현금現今 선각자로 저명著名한 모모某某가 이와 같이 가르칩니다.” “화두 드는 법도 자세히 모르고 학자學者들을 거느리고 앉아서 도를 가르치는 것은 대단大端한 일입니다. 한 장님이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격으로 화두에 시심마가 들어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하니, 그러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 드는 사람은 잣나무가 이 무엇인가? 마삼근麻三斤 화두 드는 사람은 삼 세 근이 무엇인가? 간시궐幹屎橛 화두 드는 사람은 마른 똥 막대기가 무엇인가 하겠구나. 그래서 잣나무와 삼 세 근과 마른 똥 막대기를 알지 못하여 이것을 알려고 무엇인가 하는가? 참으로 알자면 산이나 물이나 돌이나 일체一切 만물萬物을 다 활구로 알기는 어렵다마는 그렇게 화두를 드는 법은 아니다. 또 네가 무無자를 알지 못해서 무엇인가 하는가? 일체一切 화두에다가 시심마를 넣어서 의심하지 아니하여도 화두마다 제 화두에 의심이 있는 것이다.”
4. 모든 화두마다 본의심本疑心이 있으며, 또 병病 된 것을 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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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마是甚麽는 일물一物의 소이연所以緣을 알지 못해서 의심疑心하는 것이니, 이 물건은 천지 허공虛空과 만물萬物을 온통 집어삼키고 있는 물건物件이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이 물건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고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며, 없고 있는 물건도 아니요 참으로 없는 물건도 아니요, 일물一物이 아니라고 할 것도 아니요 다만 일물이라고 할 것도 아니요, 일체 사의思議로 알 것도 아니요 일체 불사의不思議로 알 것도 아니니, 이것이 무슨 물건物件인가? 이와 같이 다만 의심疑心할지어다. 만일 이 밖에 다른 말과 다른 사상思想이 있으면 병이니라. 다만 이것이 무슨 물건物件인가만 할지어다. 이것은 무자無字나 시심마나 백천 화두百千話頭가 의심疑心하는 것과 그 병이 되는 것이 한 가지로 일반이니라. 무자無字는 중국말 조선朝鮮말이 다르니라. 즉, 순전純全한 중국말로 하면 준동함령蠢動含靈 개유불성皆有佛性 조주인심도무趙州因甚道無라 하나니, 이것을 전제全提라 하고, 인심도무因甚道無 이것을 단제但提라 하니라. 또 순전히 조선말로 하자면 고물고물한 것까지라도 신령神靈한 것을 머금은 것이 다 깨닫는 성품이 있다고 하셨거늘대각께서 다 각성이 있다고 하셨다. 조주趙州는 무슨 까닭으로 없다고 하는가? 또 무엇을 인하여 없다고 하는가 하는 것이며, 조선말하고 중국말하고 섞어서 말하자면 준동함령이 다 각성覺性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무엇을 인하여 무라 이르셨는가? 무엇을 인하여 무無라 이르셨는가 하는 것은 단제但提라 하느니라. 이 화두는 대각의 말로 보면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대원각성大圓覺性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趙州는 어찌 없다고 하시는가? 이로 좇아 의심이 다 근일近日에 선각자들이 많이 말하길, 어찌 없다고 하는가? 그러든지 또 무슨 까닭으로 없다고 하는가? 또 무엇을 인하여 없다고 하는가? 어찌 없는가? 어찌 없다고 하는가? 이와 같이 하면 다 조주趙州의 뜻을 참구參究하는 참의사구參意死句가 되니라. 조주는 무엇을 인하여 무라고 일렀는가? 또 단지但只 무무無無라 하며, 또 무가 무엇인가? 이와 같이 하면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니, 그래서 조선말과 중국말을 섞어 가면 활구活句가 되고, 순전純全히 조선말로 하면 참의사구參意死句가 된다 하니, 참 그러한 말을 마시라. 내가 항상 제방諸方의 학자學者들이 이러한 말을 함을 대단히 탄식하였느니라. 알지 못하고 선각자가 되어 남의 눈을 멀게 하지 마시라. 어찌 조선朝鮮말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면 참의사구參意死句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쓸데없는 말로 나의 잘함을 자랑하여 타인他人의 단처短處를 구求하니 참 수치한 일이니라. 여보시오. 활구活句는 어떤 것이 활구가 되고, 사구死句는 어떤 것이 사구가 됩니까? 모든 학자學者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해 주는 것은 선생의 허물이니, 그 허물이 한량이 없이 크다고 하겠다. 활구라 사구라 하는 것을 내가 비유譬喩로 말하여 보이겠다. 비유컨대 그대가 허공虛空을 허공과 같이 그려내겠는가. 혹자가 말하길, “허공은 비고 통하여 상하변제上下邊際가 없으며, 물을 뿌려도 물이 묻지 아니하고, 불로 태워도 불에 타지 아니하며, 바람이 불어도 요동搖動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허공이 아닌가?” 용성이 이르길, “허공이 조만간에 그대에게 내가 여차여차如此如此하다고 말하든가? 이것은 그대의 알음알이 뜻으로 허공을 화작化作함이 아닌가? 허공이 그대의 식정識情의 화작함을 입었으니, 그러고 보면 허공의 활면목活面目이 그대의 분변의식分別意識에 화함을 입어 사구가 되었다. 이 비유를 자세仔細히 알면 활구사구活句死句가 즉시卽時 판단判斷되리라. 대체로 화두話頭에 의정疑情이 큰 불덩이와 같아서 참구하는 의정밖에는 추호만큼이라도 달리 아는 생각을 두지 아니하면 이것이 활구가 되는 것이요, 어찌 무無는 무엇을 인하여 무라 하는가 하더라도 달리 아는 마음이 있으면 사구가 되느니라. 또 무가 무엇인가 단지但只 무 하는 것은 아무 데도 못쓰게 하느니라. 무가 무엇인가 찾는 것은 네가 무無자를 몰라서 그러는가 무자를 알고도 무가 무엇인가 하는가? 백 년 삼만 육천 조百年三萬六千朝를 반복하여 아무리 찾아도 없을 무자 밖에는 또다시 다른 무자가 없다. 또 입을 삐죽여서 무무 소리를 하고 앉았으니, 생각을 붙들어 매자는 주의인가 무슨 까닭인가? 하필何必 무자만 무무無無할 것이 없다. 옴자唵字라도 옴옴唵唵하면 되지 아니할까? 내가 이것을 많이 보아 왔다. 대체로 언구를 의심하지 아니하는 것이 큰 병이니, 큰 의심이 있는 연후에야 크게 깨닫는다고 하셨다.” 근일近日에 한낱 참선하는 학자가 와서 공부工夫를 묻기에 내가 말하길, “그대가 본시本是 무슨 공부를 하였는지 말해 보시라.” 그 객客이 대답하길, “내가 마음 가운데 무자無字를 하나 써 놓고 그 무자無字를 관觀합니다.” 용성이 말하길, “그것은 참선이 아니요, 교중敎中에 혹 일몰관 백호관日沒觀白毫觀이 있으니, 차라리 그것을 하는 것이 옳지 않소?” 또 한 선객客이 와서 말하길, “나는 유무有無의 무無도 아니요, 진무眞無의 무無도 아니니, 이것이 웬 무無합니다.” 용성이 웃으면서 말하길, “그대는 병病이 나기 전에 약방문을 준비하여 가지고 다니는 것이니, 지혜가 매우 있소.” 객이 말하길,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용성이 말하길, “이것은 세상 사람이 진실하게 공부를 하여 진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쓸데없는 알음알이로 헤아려 말하길, ‘조주가 각성이 있다고 하는 말을 대하여 각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각성覺性이 있다는 말은 영각靈覺이 소소昭昭하다는 말씀이요, 각성이 없다는 말은 본래 공하다는 말이라 함으로 그 병통病通을 제거하기 위하여 있다 없다 하는 무無가 아니라고 배척한 것이며, 또 혹자들은 유무有無가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라 유무 없는 것이 참으로 없는 것이라고 지해知解를 내기 때문에 참으로 없는 무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는 병이 나기 전에 약방문을 가져 미리 약을 먹는 것이 아닌가? 그대는 미리 그런 생각을 말고 단지 무라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데에 나아가 크게 의심하되, 일체중생이 다 깨달을 성품性稟이 있거늘 어찌 조주는 무라 하는가? 무슨 까닭으로 무라 하시는가? 어찌 없다 하시는가? 어찌 없는가? 무슨 뜻으로 없다고 하는가? 어떻게 하든지 의심만 할지어다.” 또 한 선객이 이르길, “대혜大慧의 서장書狀에 말하길, ‘개도 각성이 있습니까?’ 조주 이르길, ‘무無라 함을 보라’고 하시니, 이렇기 때문에 무자만 볼지언정 무슨 의정을 하리요.” 용성이 이르길, “슬프다. 세상 사람의 가지가지 병통이 참으로 말할 수 없다. 그 무자를 보라 한다고 하니, 그대의 눈으로 보는가, 마음으로 보는가? 그것은 개가 각성이 있습니까? 조주 말하길, ‘무하는 것을 의심하여 보라’고 하는 말씀이다. 정전백수자화두庭前栢樹子話頭는 어떤 사람이 조주趙州께 묻길, ‘어떤 것이 달마 조사가 서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조주 말씀하시길, ‘뜰 앞의 잣나무라’ 하시니 이 화두話頭 드는 법法은 서쪽에서 오신 달마 조사達摩祖師의 뜻을 묻는데 무슨 까닭으로 잣나무라고 하는가? 또 무엇을 인因하여 잣나무라고 하셨는가 할지어다. 간시궐화두幹屎橛話頭 드는 법은 어떤 사람이 운문雲門에게 묻길, ‘어떤 것이 각입니까?’ 운문이 말하되, ‘간시궐이라’ 하시니, 이 화두 드는 법은 각을 묻는데 무슨 뜻으로 간시궐이라 하시는가? 다만 무슨 뜻으로 간시궐이라 하였는가 할지어다. 또 부모미생전화두父母未生前話頭 드는 법은 위산潙山이 향암에게 묻길, ‘네가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한 글귀를 일러 볼지어다. 그런 후에야 너(汝)로 더불어 서로 보리라’ 하시니, 부모父母는 나의 고깃덩어리라 이 몸을 생하였을지라도 부모가 나의 본래면목을 낳지 못하였으니,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 의심하여 볼지어다.” 혹 물어 말하길, “그러면 내가 전세前世에 개로 사람이 되었던가? 스스로 사람이 되었던가? 의심하여 보라는 말이요?” 용성이 대답하길, “그것을 궁구하라는 말이 아니요, 나의 천진天眞한 본연本然의 면목面目은 부모가 나를 나려고 하여도 능히 나지 못하나니, 나의 본래 구주인舊主人의 면목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부모가 낳기 전에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 의심함이다. 또 만법귀일화두萬法歸一話頭는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나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의심하는 것이니라.”
5.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데 모든 병통을 자세히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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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大抵 모든 병病이 아는 데서 나느니라. 중생의 아는 마음이 파리와 같다. 파리가 모든 물건마다 다 옮겨 붙지만 불꽃 위에는 엉겨 붙지 못하나니, 중생의 아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라. 아는 가운데에 두 가지 병이 있으니, 하나는 마음이 총명하여 잘 아는 것으로 계교計較를 잘 내며, 생각을 잘 하여 재주로 도道를 알려고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법을 입으로 의론하여 알 수 없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알 수 없다고 하는 이 두 가지 병이 있다. 이 아는 병과 모르는 두 가지 병으로부터 네 가지 병이 있다. 하나는 병으로부터 유심병有心病을 내는 것이니, 혹자들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과 귀로 듣고 아는 것과 코로 냄새를 맡고 아는 것과 입으로 맛보고 아는 것과 몸에 닿아 아는 것과 뜻의 뿌리로 분별하여 아는 것과 이 여섯 가지 문으로 감각하여 아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자도 있고, 혹 소소영영昭昭靈靈으로 길을 삼으라는 사람도 있으니, 이것이 육근六根의 광영光影을 지키는 것이다. 종을 그릇 알아 상전을 삼느니라. 혹 공空함을 돌이켜 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혹 공을 증득證得하는 것을 도道로 삼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이 다 병이다. 혹 나의 본심本心으로 계행戒行도 가지고 절도 짓고 각사覺事도 하고 모든 복덕福德을 지어야 성각이 된다는 것이 다 우치愚痴한 병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나의 본성은 억지로 조작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보아라. 허공을 사람이 만드는 것인가. 우리의 본성을 짓는 것으로 아는 것이 이와 같다. 네가 아는 마음으로 무량겁無量劫을 이리저리 생각하여 볼지라도 추호도 상관相關이 없느니라. 그러면 모르는 마음이 도가 되는가? 혹자들은 무심無心이 도道라 하여 무심을 짓되 얼굴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죽이어 얼굴은 고목古木나무와 같이 하고, 마음은 찬 재와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병이다. 혹자들은 마음을 비우고, 아무 모습이 없이 아는 것으로 도를 삼으며, 혹자들은 어느 때든지 마음을 쉬어라. 쉬고 쉬어 가면 정념情念이 나지 아니한다 하니, 이것은 달마 성사達摩聖師가 중국에 처음 왔을 적에 2조二祖 혜가 성사慧可聖師께서 밖으로 치구馳驅하는 마음을 쉬지 아니하여 한없는 총명聰明으로, 마음이니 성품性品이니 이치니 하여 여러 가지를 설하여 도를 증거證據하였다. 달마께서 2조 혜가를 꾸짖어 말하길, “네가 도를 알고자 한다면 밖으로 모든 인연을 제거하여 버리고 안으로 마음이 헐떡이지 아니하여 장벽牆壁과 같이 하여야 도에 들어가리라.”라고 하시니, 혜가께서 달마의 말씀하신 그 자리에서 모든 인연을 쉬고 크게 깨쳤으니, 이것은 혜가의 치구심馳求心을 제거하려는 잠시방편暫時方便이라 진실로 일정한 법法이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마음을 고목古木나무와 돌덩이같이 만들라고 하니, 참 불쌍하다. 또 말끔한 것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 도를 삼으니, 이것은 제8식第八識을 지키는 외도外道라 각법覺法하고는 상관이 없다. 탕탕무애蕩蕩無碍하여 마음대로 자재自在하게 하라. 생각이 일어나든지 생각이 멸하든지 제멋대로 내버려 두어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니, 이것은 자연自然 외도外道라 각의 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다 아는 병과 모르는 병과 두 가지 나지 아니하는 것이니, 학생學生에게 만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각자先覺者가 잘못 가르쳐서 병이 있다. 도를 알지 못하거든 남을 가르치지 말지니라. 그 죄악罪惡이 천지에 용납容納하기 어렵다. 남의 대사大事를 그르쳐 주니, 그 허물이 적다 할 수 없다. 근일近日에 견성見性한 사람이 많으나 실지實地상으로 보면 참으로 없다고 하여도 가可하다. 일시一時에 적은 명리名利를 탐하다가 무량겁無量劫에 허물이 되리라. 또한 도를 실답게 참구參究하여 실답게 깨치는 것이 옳거든 눈치와 말로 알려고 하니 참 어리석다.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실답게 깨닫지 못하고 어찌 눈치로 알며 말로 알며 문자文字에 있는 언설言說로 알겠는가. 또한 말없이 고요히 하고 잠잠한 것으로 알 수 없다. 나의 진면목眞面目은 적묵寂默도 아니요, 유심有心이라 무심無心이라 언어言語라 적묵寂默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진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묻길, “육조六祖가 이르시길, ‘위로 하늘을 기둥 하고 아래로 땅을 기둥 하였다’고 하시니, 천지 사이에 가득히 찼다는 말인가?” 용성이 대답하길, “그런 것이 아니다. 위로 하늘을 버티는 기둥이 되니 하늘이 이것이 아니면 능히 덮지 못하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는 기둥이 되니 땅이 이것이 아니면 능히 싣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천지만 버티겠는가. 온 세계世界와 허공虛空과 법계法界를 온통 집어먹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길,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열 가지 병이 있으니, 다른 화두도 열 가지 병이 있습니까?” 대답하길, “화두마다 있다.” “그러면 그 열 가지 병을 자세히 일러 주시오.” 대답하길, 열 가지 병이 아는 것으로 있으니, 이 아는 한 글자가 도에 장애障碍되는 것이니, 이 아는 것으로부터 이것은 이런 뜻이다, 저것은 저런 뜻이다, 이것은 이런 이치다, 저것은 저런 이치다 하는 병이며, 귀로 듣고 마음으로 뜻을 풀어내어 요리조리 사량하나니, 이것으로 좇아 뜻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의론하며, 또 생각할 수 없는 두 가지 병이 있고, 이것으로 좇아 네 갈래로 병이 있으니, 있는 마음으로 구하고자 하며, 없는 마음으로 얻고자 하며, 말로 지으려고 하며, 잠잠한 것으로 통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좇아 열 가지 병이 있으니,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아는 것과 참 없음으로 아는 것과 도리로 아는 것과 의근으로 이리저리 헤아려 아는 것과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짝깜짝하는 곳에 묵묵한 업의 집을 짓고, 뿌리를 박는 것과 말로 쟁기를 삼아 활계活計를 짓는 것과 일 없는 구덩이 속에 있는 것과 각조의 향상관向上關을 거기擧起하는 곳에 승당承當하는 것과 문자 중에 인증引證하는 것과 미迷를 가져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을 열 가지 병이라 하니라. 이 열 가지 병이 경교經敎 가운데에 있으면 법계法界 부사의不思議 법法이 되거니와 경전經典 밖에 별도로 전한 것으로 보면 큰 병이 되느니라. “그러면 이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기를 바라노라.” 대답하길, “첫째는 있다 없다는 무로 아는 병이니, 학자學者의 대병大病은 깨쳤다 알았다 하는데 모든 병이 있다. 확철確徹이 깨치지 못하면 병이 많은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화두만 참구參究하는 것이 좋다.” 혹 어떠한 사람은 내가 조주趙州께서 무를 말한 것을 깨쳤다. 어떻게 깨쳤는가. 예, 내가 깨친 것은 각성覺性이 있는 것을 대하여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각성이 있다고 하는 말은 깨치는 성품이 있다는 말이니, 이 신령하고 참된 성품이 외로이 드러나 각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일체중생이 각성이 있다는 말이다.신령하게 깨치는 성품을 각이라고 한다. 각성이 없다는 말은 신령하게 깨치는 그 당처當處가 본래공本來空하여 한 법도 없는 것이니, 무엇을 각이니 마음이니 성품이니 하는가? 그러므로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용성이 말하길, “당신의 말씀은 각조의 설화문說話門에 앉아 보면 병이 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화두참구話頭參究하는 데에는 큰 병이 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길,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알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둘째는 참 없다는 병이니, 가사 어떠한 사람이 화두를 깨쳤다 하거든 곧 묻되 어떻게 깨쳤는가. 예, 내가 깨친 뜻은 나의 본래면목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절대絶對로 없어 각성이 있느니, 각성이 없느니 이것을 다 벗어버려 참으로 없는 것이니, 이같이 깨달았는가. 용성이 말하길, “유무有無를 함께 보내면 정각正覺을 수순한다는 말씀은 경에도 있으니, 이것은 각조의 설화문에 좋은 말이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큰 병이 되느니라.” 셋째는 도리道理로 아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길, “내가 한 가지 깨침이 있다. 이미 있고 없는 것으로 알 수 없고,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가 다 공한 것으로도 무자의 뜻이 아니라고 하니, 내가 또다시 깨친 곳이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깨쳤는가에 내가 묘妙한 것으로 알았소. 묘한 것으로 알다니 무슨 말인가. 말로 보일 수 없고, 분별로 알 수 없는 것이 묘한 것이요. 내가 『법화경法華經』을 보니, 그치고 그치라 말하지 아니 하리니, 나의 법法은 묘妙해서 사의思議하기 어려우니라 하시니, 조주무자趙州無字도 이와 같소.” 용성이 말하길, “그대가 이 말이 경교로 보면 병 될 것이 없겠지만 활구에는 큰 병이 된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이 혹 현현묘묘玄玄妙妙한 도리道理로 도道를 삼을까 염려(접허)하여 도리道理로 앎을 짓지 말라 하셨다.” 넷째는 의근이 헤아리는 병이니, 이 사람이 모두 병이 되는 것이라 함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 하여 까막까막 생각하여 헤아리어 알려고 하거늘 급히 호령하여 말하길, 이 여의如意한 정녕精靈이여!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을 하는가? 그러므로 고인이 의근意根으로 헤아리지 말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눈썹을 찡긋찡긋하고 눈을 끔쩍끔쩍하니, 이 사람이 다시 이르길, “내가 깨친 바가 있노라.”라고 하였다. “여보시오. 당신이 어떻게 깨쳤는가.”“예, 이것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소. 이것은 가만히 작용作用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는 없겠소. 그러자면 가만히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짝이는 것이 그 진상眞相으로 보이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압니다.” 용성이 급히 소리를 쳐서 말하길, “곧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하고 옛 사람의 기틀을 따라 한 번 눈을 깜작여 보이는 것으로 자기의 깨침을 삼는가?” 그러므로 고인이 말하길,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작이는 곳을 향하여 무수겁의 집을 짓지 말라.”라고 하시니, 이것이 무자無字의 뜻을 깨친 것이 아니다. 여섯째는 진실로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말로만 도를 말하지 말지어다. 말은 도가 아니다. 일곱째는 일 없는 갑匣 속에 있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길, “내가 무無자를 또 깨친 바가 있다고 함에 어떻게 깨쳤는가? 예, 내가 깨달은 바는 곧 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도를 듣고 갖가지 분별심分別心과 갖가지 치구심馳求心이 있기 때문에 한 칼로 동강을 내어 당장에 일 없음을 깨치게 하기 때문에 무라고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용성이 이르길, “그대가 자성을 확철廓徹이 깨달아야 무자無字를 타파打破한 것이다. 이제 너의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할 것이 없다 일이 없다 하니, 다시 대답하여라. 어떤 것이 조주趙州 무자의 의미인가?” 저가 다시 대답하길, “함이 없고 일 없는 것이 무無에 이른 뜻이오이다.” 용성이 이르길, “그까짓 소견으로 어찌 무상도無上道를 알겠는가. 근일에 학자들이 흔히(多分) 이러한 폐단이 많다. 자칭 일 마친 사람이라 해서 고기 잡는 집과 술파는 집에 한가히 노닐며 녹수청산에 뜻대로 하여 함이 없이 즐겁다 함이니, 이것은 네가 무단이 지레 꿰여졌다. 그러함으로 옛사람이 말하길, 일 없는 갑匣 속에 있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그 사람이 묵묵부답하였다. 용성이 말하길, “알겠는가. 승이 조주趙州께 묻길, ‘구자狗子 도리어 각성覺性이 있습니까?’ 조주 대답하길, ‘무無라’ 하심을 볼지어다.” 그 사람이 예배하였다. 용성이 급히 말하길, “예배는 무슨 일을 위함인지 알고 예배하는 것인가.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인가. 승당承當하는 뜻인가.” 답하길, “승당하는 것이요.”“그러면 알고 하는 것인가? 모르고 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호령하였다. 용성이 천연한 태도로 소리를 질러 말하길, “큰 용을 낚자고 하였더니, 쓰지 못할 작은 자라가 앙금앙금 걸어 나온다. 다시 일러 보라.” 그 사람이 잠잠하고 있었다. 웃어 말하길, “찬 벙어리다. 현현玄玄한 지취旨趣를 알지 못하고 한갓 적묵寂默하기만 뇌롭게 하고 있다.” 그 사람이 눈만 멀뚱멀뚱(디룩디룩)하고 소향所向을 알지 못하였다. 용성이 소리쳐서 말하길, “무상도無上道를 눈치로 알려고 하는가. 근일近日에 종사宗師가 고인古人의 향상법向上法을 들어 말하면 얼른 눈치로 알아 승당하는 사람이 많으니 가히 애석하다. 그러하므로 옛사람이 고인의 화두話頭를 들어 말하는데 승당承當하지 말라고 하니라.” 아홉째는 문자 중에 인증하는 법인데, 그 사람이 다시 이 말 저 말 여러 말을 끌어대어 말하길, “아무 경에는 이렇게 말하고 아무 글에는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용성이 말하길, “그대의 도안道眼이 명백明白하여 가슴 가운데 솟아난 것이라도 지극히 바르고 자세히 하여 간택할 것이다. 어찌 고인의 착안한 것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인증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이 문자文字 가운데 인증함을 허락하지 아니하니라.” 열째는 미혹함을 가지고 깨치기를 기다리는 병이다.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길, “나는 미혹한 사람이니, 어서 깨치기를 기다린다.” 용성이 말하길, “내가 미하였다고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어찌 그러한가? 내가 고인의 현관玄關을 알지 못하오니, 어서 급히 공부하겠다고 하여 머리에 불을 끄듯 하나니, 급히 깨칠 마음이 앞에 있어 큰 장애障碍가 되니라. 부디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혹자가 사량하여 말하길, ‘조주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사람을 보고 공연히 빵긋빵긋 웃고 물건을 가지고 희롱하여도 이름을 모르나니, 무자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며, 또 혹자는 말하길,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요, 구자狗子는 다만 구자요, 무자無字는 다만 무할 밖에 없다’ 하며, 또 혹자는 ‘조선문朝鮮文에 무자無字라’ 하나니, 이것이 큰 병이 되나니, 이 문중門中에 들어와서는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만 화두話頭만 참구參究하고, 아는 마음은 두지 말지어다.” 천하만세天下萬世 영웅호걸英雄豪傑이며, 고금古今의 철학가哲學家가 하나도 이 마음을 깨친 사람이 없고, 오직 대각능인大覺能仁과 삼십삼三十三 성사聖師와 오파분방五派芬芳의 모든 성사聖師께서 크게 깨치셨다. 이 마음을 어떻게 아는가 말하여라. 혹자가 말하길, “이것은 떳떳하여 변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용성이 말하길, “그렇지 않다. 하늘과 땅이 이루고 무너지는 것과 사시四時가 변變하여 바뀌는 것과 만물이 변하여 옮기어 가는 것과 삼세가 간단없이 흘러가는 것들이 가지가지 허환虛幻하거니, 어찌 떳떳하다고 하는가. 그대의 몸이 떳떳하다고 할 수 없다. 백세광음百世光陰이 자꾸자꾸 홀로 감에 목숨이 아침 이슬과 같으니, 어찌 떳떳하다고 하겠는가. 너의 마음이 떳떳하여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또 생멸심生滅心이 변화무쌍變化無雙하나니, 어찌 떳떳하다고 하겠는가. 또 너의 성품이 떳떳한 것인가. 그러면 고금에 응연凝然히 변하지 아니하여 나는 이치가 끊어지리라.” 또다시 묻는다. 어떤 것이 너의 성품인가. 만일 빈 것이 너의 성품이라 한다면 길이 빌 것이며 있는 것이 아니요, 만일 맑은 것이 너의 성품이라면 길이 맑아 흐리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착한 것이 너의 성품이라면 길이 착하여 악하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악한 것이 너의 성품이라면 길이 악하여 착하지 아니할 것이니, 성인은 길이 성인이 되고 범부는 길이 범부가 되리라. 나아가 겁이 다하여도 한 사람도 보리심菩提心을 발할 자가 없을지니라. 옛사람이 말하길, “참된 성품이 심히 깊고 미묘微妙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라고 하셨다. 또 일체 제법을 만일 그르다고 한다면 천지만물과 사대오온四大五蘊과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그 없는 데로 돌아가 허무虛無하리니, 이것들이 다 외도外道의 견해見解니라. 옛사람이 말하길, “비고도 신령하며 고요하고도 미묘하다.”라고 하니, 네가 감히 끊어져 없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이치가 스스로 내가 이치라고 함이 없다. 마음을 인하여 이치를 세운 것이니, 본래 이치가 끊어진 것이다. 감히 이치라고 말하는 것인가. 기운이 여러 가지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허령지각虛靈知覺의 기운과 공기와 전기와 물기와 불기운의 무리들이 수효가 없다. 본래 모든 기운이 없는 것이니, 감히 모든 기운이라고 하겠는가. 인연因緣은 화합化合할 것으로 이루느니라. 이 한 물건은 인연因緣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니, 감히 인연이라고 말하겠는가. 자연自然은 천진天眞만 믿느니라. 성품은 자연도 아니니, 네가 감히 자연이라고 말하겠는가. 사제법四諦法이라는 것은 하나는 괴로운 법이니, 이것은 삼계三界에 괴로운 과보果報요, 또 하나는 멸滅하는 법이요, 또 하나는 도법道法이니, 이 도법인 인因을 닦아 몸 뿌리, 입 뿌리, 뜻 뿌리의 모든 죄악에 근본인根本因을 끊고, 청정적멸과淸淨寂滅果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니, 참 도는 마음을 찬 재와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니, 감히 사제법四諦法이라고 말하겠는가.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는 것은 일체중생이 모두 가히 사량할 만한 경계를 대하면 참으로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탐착심을 내나니, 앎이 없는 것은 어두운 무명無明의 인因이 되고, 탐착심貪着心을 내는 것은 행하는 과果가 되나니, 그렇기 때문에 무명의 인연으로부터 탐착을 행行하는 과果가 생生하느니라. 또 탐착하는 인연으로부터 모든 경계를 낱낱이 가리어 분별하여 아는 과가 나고, 또한 아는 인연으로부터 가지가지 차별을 갖추었기 때문에 명색名色의 과果가 나고, 또 명색의 인연으로 육근六根의 받아들이는 육입六入의 과果가 나고, 또 육근의 받아들이는 인연으로부터 닿는 과가 나고, 육근의 닿는 인연으로부터 낱낱이 받아들이는 과果가 나고, 또 받아들이는 인연으로 사랑하는 과가 나고, 또 사랑하는 인연으로 취取하는 과가 나고, 또 취하는 것으로부터 업業이 있는 과가 나고, 또 업業이 있는 인연으로 생生하는 과果가 나고, 또 생하는 인연으로 늙어 죽는 것이 나고, 또 늙어 죽는 인연으로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나나니, 본래 무명이 끊어졌거니 감히 십이인연이라고 말하겠는가. 각도 알지 못하나니, 감히 각승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는 것으로도 알지 못하고 지혜로도 믿지 못한다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원래로 이름과 말이 아니니, 감히 최상승最上乘이라고 말하겠는가. 본래 격내格內가 없으니 누가 격 밖을 말하겠는가. 모두 이것이 아니면 무슨 물건인지 한 번 궁구하여 볼지어다. 날파리가 곳곳마다 엉키어 붙되 불꽃 위에는 붙지 못하나니, 세상 사람의 아는 마음도 이와 같으니라. 또 한 사람이 묻길, “기운이 모이면 사람이 나는 것이요, 기운이 흩어지면 사람이 죽는 것이다. 무슨 궁구할 가치가 있으리오.” 용성이 대답하길, “기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또 기운은 지각知覺이 있는 것인가? 지각이 없는 것인가? 만일 기운이 지각이 있다고 한다면 허공 기운과 전기 기운과 물기운과 불기운이 다 아는 지각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분명히 알 것이요, 나무 돌덩이라도 기운이 다 있는 것이니, 그들이 다 지각이 있어 말하든가? 아무 지각도 없이 기운으로만 사람이 난다고 할 수 없다. 또 네 말대로 사람이 기운으로만 낳고 죽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지각이 기운을 인因하여 나타난 것인가? 기운이 지각을 인하여 나타난 것인가? 그 기운은 어디서 나는 것이며, 그 형색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궁구하여 볼지어다. 공부를 할 때에 한가히 앉아 잠만 졸지 말지니라. 혹 잠이 오거든 곧 일어나 서서 한 걸음을 걸어 다니며 공부를 놓아 버리지 말지니라.
6. 화두참구話頭參究하는 모양模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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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묻길, “화두를 의심하라 하니, 어찌 의심해야 되겠습니까?” 용성이 대답하길, “어떤 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몸에 깊이 간수하여 애지중지하다가 홀연忽然히 잃은(遺失) 것이다. 그 사람이 모르고 있다가 손으로 보배 둔 곳을 만져 보니, 보배가 간 곳이 없었다. 그 사람이 의심이 나서 보배를 어디다가 두었는지 찾는 것과 같이 할지니라. 또 어떤 사람이 날이 환하게 새기 전에 이상한 물건을 주거늘 자세히 보니, 날이 아직 확실히 새지 못한지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음에 그 사람이 의심이 바짝 난 것과 같다. 화두 드는 모양이 이와 같다. 혹 화두를 들 때에 어떤 때에는 나귀를 끌고 샘에 들어가는 것과도 같고, 어떤 때에는 뜨거운 불과 같이 번뇌가 끓고, 어떤 때에는 차가운 얼음과 같아야만이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어떤 때에는 순풍에 돛단배와 같아야 술술 잘 된다. 그러나 이 공부가 잘 되든지 못 되든지 좋고 언짢은 마음을 두지 말고, 화두만 다만 들지니라. 또 고요히 앉아 있지 말고 맑은 것을 취하여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운동運動하고 능히 말하며, 능히 동하고 능히 고요히 하는 것으로 공부를 삼지 말며, 또 망령된 마음을 억제하여 누르는 것으로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생각을 허공과 같이 하든지, 또 마음을 담벽과 같이 하여 공부를 하지 말지니,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며, 혼魂이 흩어지지 아니하여도 죽은 사람이다. 다만 이 한 물건 모르는 것을 의심疑心할지니라. 공부를 일심一心으로 하여 가면 보고 듣는 경계가 자연히 고요하고 물건과 나를 함께 잊어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없어지고 허공이 녹아지나니,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자연히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하리라.” 또 묻길, “망상이 자꾸 나니 그 망상을 어떻게 제거할까요.” 용성이 말하길, “망상이 일어나든지 아니 일어나든지 가만히 두어 망상을 제거하려고 말라. 망상을 제거하려고 하면 망상이 더 일어나느니라. 비유컨대 소가 달아나거든 소고삐를 단단히 잡아 당기며 소가 스스로 사람을 쫓아오는 것과 같아서 망상이 나든지 아니 나든지 상관을 말고 화두만 들어 의심하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리라. 또 화두로 망상을 제거하려고 말며, 또 다만 화두만 들어 의심하여도 망상을 걷잡을 수 없거든 화두를 즉시 놓아 버리고 마음도 쉬고 여전한 뒤에 다시 화두를 들면 새롭고 다시 깨끗해진다. 또 화두를 들어 의심할 적에 몸과 마음을 다 놓아 항상 더불어 편안히 하고 화두를 또렷이 의심할지니라. 화두를 너무 급急하게 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하여 가슴도 답답畓畓하며 머리도 아프며 코에서 피도 나나니, 이 병은 마음을 너무 조급히 한 탓이다. 또 마음을 너무 방심하면 화두를 잃기가 쉬운 것이니, 부디 화두를 너무 극도로 하지 말고, 너무 방심放心도 하지 말라. 거문고 줄이 늦어도 소리가 나지 않고 되어도 소리가 아니 나나니, 공부를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비유컨대 사람이 죽장마혜竹杖麻鞋로 첩첩疊疊한 산중山中을 들어가다가 홀연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하여 진퇴進退할 곳이 없다. 이럴 때를 당하여 용단력勇斷力을 다하여 한 걸음 나아가면 꽃이 불긋불긋하고 버들이 푸릇푸릇한 곳에 별천지가 있으리라. 세상世上에 다른 것은 다 아는 마음으로 헤아리어 궁구하지만, 이 공부는 단지 알지 못할 이 한 물건을 일심으로 의심하여 참구하는 것이다. 헤아리어 알고자 하면 만년 궁구하여도 알지 못한다. 화두를 참구할 적에 무슨 재미를 찾지 말고, 모기가 쇠로 만든 철소 위에 앉아 입 뿌리를 내리지 못할 곳을 향하여 신명神命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번 뚫어 들어가면 몸조차 쏙 들어갈지니라. 화두만 일심으로 의심하여 궁구하고 추호라도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지니라. 일난풍화日暖風和 춘절春節이 돌아오면 꽃 피고 잎이 피듯이 공부가 익으면 자연히 같이 되리라.
7. 공부에 불가불不可不 마군魔群이를 알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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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이 이르길, 공부하는 도인들은 마장魔障을 먼저 알 것이다. 마魔라 하는 것은 생사生死를 좋아하나니, 사람의 지혜를 끊으면 착한 법을 파괴破壞하며, 오욕五欲에 탐착貪着하는 것이다. 마왕魔王이 세 가지 악한 것이 있으니, 악한 것으로써 해롭게 함에 악한 것으로써 갚으며, 또 사람이 나를 해하지 아니 하는데 무고無故히 악으로써 해롭게 하며, 사람에게 은혜를 입음에 갚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해를 끼치나니, 삼계 가운데에 마왕의 악惡이 극심極甚하다. 묻길, 무엇을 마왕이라 하는가? 대답하길, 대저 세계가 있으면 육도六道가 있고, 육도가 있으면 선악善惡이 있고, 선악이 있으면 사정邪正이 있는 것은 무궁겁無窮劫에 바뀌지 못할 정리正理이다. 한량이 없이 옴으로 수없는 마왕은 다 말할 수 없거니와 이제 내가 경전經典 중中에 많이 본 것으로 말한다면 욕계欲界에 여섯 하늘을 지나서 색계천色界天에 올라가기 전에 마왕 세계가 있는데 궁창이 오천 유순이오. 복 받는 것은 색계천과 같다. 모든 마가 몇 가지나 되는가? 대답하길, 두 가지 마로부터 여러 가지 마魔가 있으니, 하나는 나의 마음 가운데에서 나는 마요, 또 하나는 밖에서 들어오는 마다. 첫째, 나의 마음에서 마가 일어나나니, 첫째는 오음마五陰魔요, 둘째는 번뇌마煩惱魔요, 셋째는 산란마散亂魔요, 넷째는 음란마淫亂魔요, 다섯째는 탐마貪魔요, 여섯째는 진심마嗔心魔요, 일곱째는 즐거워하는 마요, 여덟째는 슬픈 마(悲魔)요, 아홉째는 조그만큼 깨치면 자족自足한 줄로 아는 마요, 열째는 잘 안다는 마요, 열한째는 아만마我慢魔요, 열둘째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음마陰魔요, 열셋째는 마음을 일으키는 천마天魔요, 열넷째는 일으키기도 하고 아니 일으키기도 하는 희론마戱論魔요, 열다섯째는 인과因果가 없다는 마요, 열여섯째는 사견마니, 범인의 마음 가운데에 팔만사천 장애하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팔만사천 자심마自心魔가 있다. 외마外魔가 들어오는 것은 옛사람이 말하길, 벽壁이 틈 나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이 틈 나면 마가 침노한다 하니, 원컨대 도道 닦는 사람들은 목인木人이 꽃 보듯 새 보듯 하여 무서워하지도 말고 즐거워하지도 말 것이다. 혹 도 닦는 사람에게 음마陰魔든지 천마든지 귀신마든지 이매망양마든지 산정요괴山精妖怪들이 수도인修道人을 뇌롭게 하여도 업을 파괴破壞하나니, 간절히 마음에 주의注意할 것이다.
8. 마가 도덕을 해롭게 하는 연유를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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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길, “무슨 일로 모든 마들이 남의 도덕을 해코자 하는가?” 대답하길, “내가 『능엄경』을 보니 경에 말씀하시길, ‘도를 닦는 마음이 정답고 일정한 곳에 들어감에 시방의 정사와 무루無漏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마음이 지극히 정밀하여 담연청정淡然淸淨하면 모든 마왕과 범부의 하늘들이 인간 사람과는 다르다. 그 무리들의 오통신안五通神眼으로 궁전이 무고히 무너지며 땅이 떨어지고 벌어지며 물과 육지가 날며 솟음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한다. 인간 사람은 어두워 알지 못하거든 범부의 하늘 무리들은 다섯 가지 신통이 있어서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서 서로 와서 백천 방편으로 도를 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한 사람이 참된 마음을 발하여 본원각성으로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다 녹아지거니, 어찌 허공 가운데에 있는 세계가 무너지지 아니하겠는가.’”
9. 도를 해롭게 못함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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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께서 다시 말씀하시길, ‘저 모든 마가 비록 크게 성을 내지만 그의 무리들은 진뇌망상 가운데에 있는 것이요, 너는 묘각妙覺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신통을 다하여 도를 파괴하려 하여도 비유컨대 바람이 태양광명을 불어 옮기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칼로 물을 베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조금도 서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요동하면 마의 장애를 이룰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는 끓는 물과 같고, 범부 하늘과 마왕과 모든 귀신들은 얼음과 같아서 더욱 기운이 가까이 오면 곧 녹아지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신력을 믿어도 쓸 곳이 없다’ 하시니, 그러므로 도를 닦는 사람은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고, 단지 일심으로 조사공안을 의심하여 궁구할지어다. 기름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마침내 찾아낼 수 없는 것과 같아서 한 번 사도로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우니라.
10. 외도의 괴수된 자만 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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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일에 각법을 해하는 도는 승려 가운데에 가장 많고, 선지식 중에도 간간이 있다. 묻길, “선지식이면 어찌 외도라고 하겠는가.” 대답하길, “요사이 사람들은 조사공안을 실답게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여 사람에게 스승 되기를 좋아하여 학자의 안목을 많이 눈멀게 하니, 참으로 슬프다. 사와 정을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 대단히 희소하며, 사와 정을 알고 배우는 사람이 대단히 적다. 그렇기 때문에 외도는 견성한 사람에게 많이 있다.” 묻길, “외도가 몇 가지나 되는가요?” 대답하길, “이십 가지 큰 외도가 있는데 모든 외도 중에 상수가 된다. 내가 간략히 간택하겠다. 모든 외도는 깨달았다고 아는 데에 있으니, 아니 깨치면 말 것이지만 깨달았다면 철저히 깨달아야 될지니라. 모든 외도들은 다분히 각법 중에서 도를 닦다가 소견이 잘못 들면 외도가 되느니라. 저 외도들도 제자가 많이 있다. 각기 내가 무상대도를 이루었다고 하느니라. 참 애달프다. 곡식에서 벌레가 나가지고 도리어 곡식을 해롭게 한다. 외도가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가 알지 못한 탓이다. 참 도는 대단히 알기 어렵다. 내가 비유로써 조금 말하겠다. 오음산五陰山에 하나가 있거든 저 오음산 밖에 또 산이 하나 있어 이름을 대각산大覺山이라 하니라. 그러나 이 산이 지극히 높을 뿐만 아니라 사면四面이 철벽鐵壁이라 발을 붙일 길이 없으나 오직 오음산이 있어 한 실마리 길이 통하니, 이 오음산이 평지로부터 절정絶頂에 가기가 오백 리며, 그 정면중심正面中心으로 길이 하나 있으니, 대각산大覺山으로 바로 가는 길이니라.이 비유는 모든 병에 걸리지 아니하고 다만 일심으로 화두만 하면 필경에 크게 깨친단 말이다. 양 옆에 오십 군데로 갈라 가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이 험악하여 독사와 호랑이의 굴이 있어서 행인들이 낱낱이 호랑이와 독사에게 잡혀 먹히는 바가 되느니라.이것은 오음五陰 중에 오십 군데로 갈라 가는 험악한 삿된 길을 말한다.
11. 색음色陰이 녹을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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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컨대 날이 지극히 차가움에 물이 어린 것을 얼음이라고 하고, 마음이 출렁(動蕩)임에 그 습기로 맺힌 것을 오음이라고 하나니,색음色陰은 오음 가운데 하나의 수로 있는 것이니라. 어찌 음陰이라고 하는가? 비유컨대 날이 음함에 태양太陽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과 같아서 오음이 일어남에 맑은 마음이 나타나지 아니함을 그것들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을 일심으로 닦아 감에 습기習氣로 맺히어 있던 색음色陰이 녹아지는데 열 가지 보지 못하던 희유한 경계가 나타나나니, 첫째는 몸이 능히 걸리는 데에 나가는 것이니, 산속이나 물속이나 석벽 속이나 능히 걸림 없이 왕래하는 것이요, 둘째는 몸이 온통 내외內外 없이 환히 보이는 것이 유리와 같은 가운데 회와 벌레를 주워 내어 몸이 조금도 헐고 상함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공중空中에 법설法說함을 듣는 것이니, 안과 밖이 텅 비어 사무치며, 눈 뿌리에 아는 것과 귀뿌리에 아는 것과 코 뿌리에 아는 것과 혀뿌리에 아는 것과 또 뜻 뿌리에 의탁하여 아는 것들이 색음이 녹는 바람에 다 그전 경계를 잃어버리고, 서로 빈주賓主가 되어 공중에 설법함을 듣느니라. 넷째는 각의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과 경계가 신령하게 깨달은 데 물들임으로 마음의 광명이 밝아 모든 세계에 환하게 비추는 것이요, 다섯째는 허공이 보배 빛으로 화化하는 것이니, 마음을 억제하여 잡된 생각이 없게 됨에 그 쓰는 힘이 뛰어나기 때문에 허공이 보배 빛으로 변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어두운 집이 낮과 같이 밝은 것이니, 마음 닦음이 점점 깊어 감에 그 보는 것이 점점 맑아져 그 아는 마음이 광채가 찬란하여 어두운 것을 깨쳐 보는 것이요, 일곱째는 몸에다가 불을 놓고 칼로 찍어도 아픔을 깨치지 못하는 것이니,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오진五塵이 함께 녹음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를 흩어 순전히 몸이 공하느니라. 여덟째는 세계를 다 사무쳐 보아 각국을 이룸이니, 오탁악세를 싫어하고 각 세계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어리어 정밀하게 닦아 생각이 오래 함에 자기의 아는 마음이 각국을 화化한 것이요, 아홉째는 한밤중에 산이든지 물이든지 석벽이든지 멀고 가까운 것을 걸림 없이 보나니, 이것은 마음을 정밀히 닦아 그 정신이 핍박됨으로 그 투명透明한 것이 원근이 없이 사무쳐 보느니라. 열째는 외마外魔가 점점 들어오는 것이니, 그 마군의 신통으로 혹 선각자도 나타나며, 혹 각과 정사도 나타나며, 혹 미인美人도 나타나며, 혹 호랑이와 사자도 나타나되 그 변화가 불규칙하여 백천 방편으로 공부를 저해하고자 하며, 혹 사람을 미치게도 하나니, 만일 도인이 공부를 힘써 하다가 이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나거든 추호라도 희유한 생각이든지 공포恐怖한 생각이든지 모든 생각을 내지 말고, 다만 일심으로 공부만 할지니라. 모든 마군이는 스스로 없어지고, 공부는 점점 앞으로 나아갈지니라. 만일 이 경계를 깨치지 못하면 자기의 신세를 그르치리라. 세상 사람이 조그만큼 아는 것이 있으면 희유한 생각을 내어 마음이 전도하는 까닭으로 대도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12. 수음受陰이 녹아지고자 함에 열 가지 마군이가 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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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는 것을 두지 아니하고, 일심으로 나아감에 색음은 다 녹아지고, 또다시 수음受陰이 녹고자 할 때에 열 가지 마군이 경계가 나타나나니, 자세히 보고 공부할 것이니, 수음의 성질은 받아들이는 것이니라. 색음이 이미 다 녹음에 내외內外가 비어 융통하나 수음이 녹지 못하면 가위눌린 사람과 같아서 훤히 들리고 보이나 마음에 객기客氣가 접촉接觸된 것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 것과 같다. 이 색음이 녹아지면 이 몸으로 산하석벽을 걸림 없이 다 드나들고 수음受陰이 다 녹으면 비유컨대 사람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몸에서 출입出入하기를 마음대로 하느니라. 첫째는 일심으로 마음을 닦는 것으로 수음受陰이 녹을 때에 마음이 몸을 떠나 순식간에 무량세계를 두루 왕래하여 자유自由로이 하거든 그때에 자기가 위없는 도를 성취한 것으로 알고, 저 중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내어 저 중생을 어찌할까 하여 눈물을 흘리며 모기만 보아도 외아들 생각하듯 하여 눈물을 흘리나니, 이것은 비마悲魔가 마음에 들어간 것이고, 둘째는 그 마음이 한없이 날카롭고 용맹하여 모든 성현을 업신여기나니, 이것은 미친 마군이가 들린 것이며, 셋째는 크게 목마른 생각을 내나니, 정력定力은 굳세고 지혜는 적으며, 또 수음이 다 녹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아감에 새로이 더 증득한 것은 없고 색음은 이미 녹고 아득히 의탁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답답하여 목마른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넷째는 내가 위없는 도를 철저히 증득함이라 하여 다시 공부를 하지 아니하나니, 지족知足하다는 마군이가 들어와 붙은 것이고, 다섯째는 무단히 근심하여 살고자 아니하나니, 곧 근심 마군이가 들어와 붙은 것이며, 여섯째는 즐거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나니, 이것은 희마喜魔가 붙은 것이고, 일곱째는 무단이 아만심我慢心을 걷잡지 못하여 고금의 천하에 한 사람도 눈앞에 없다. 모든 사람에게 포고布告하여 말하길, ‘각상覺像이라 함은 우상偶像에 불과한 것이다. 너희들이 이것을 보라. 이것은 금으로 만든 것이요, 저것은 구리로 만든 것이요, 또 이것은 흙으로 만든 것이요, 저것은 나무로 만든 것이다. 또 저 경을 보라. 이것은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참된 것인데, 이것을 공경치 아니하고 무단히 쓸데없는 흙과 나무를 숭배하여 예배 공경하는 것이 실로 허망하다’ 하니, 누가 이것을 알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경전과 각상은 만세에 표준뿐이라 저만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큰 아만마군이가 붙은 것이니라. 여덟째는 무단이 한량없이 편하다는 마음을 내서 노래도 하며 춤도 추나니, 이것은 경청마輕淸魔가 붙은 것이고, 아홉째는 비고 밝은 성품을 얻어 길이 없어진 것으로 주장하여 인과가 없다 하나니, 이는 공마空魔가 붙은 것이며, 열째는 그 공부가 깊이 듦에 수음이 다 녹아질 지경에 이름에 그 마음이 홀연히 사량함을 내나니, 사량이 극도에 이르면 미친 마음이 발하여 탐욕심이 불이 일어나듯 하나니, 이는 욕마欲魔가 붙은 것이니라. 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부디 자세히 이 글을 보라. 마군이에게 속지 말라. 요사이에 선지식이 많으나 외도 마군이가 대단히 많다. 근일 승려들이 석가대성의 제자라 하나 거반 외도 마군이의 종자다. 그들이 자칭 내가 불제자라 내가 선지식이라 하나 그 실상은 석가의 도를 해롭게 하는 외도 마군이다. 승속 남녀 없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모두 속아 지내나니, 참으로 애석하다. 내가 이와 같은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도 민망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하니라. 선지식이라 자칭하는 자가 옛적이나 지금이나 많이 그러한 병통이 있다. 대혜 종고 선사大慧宗杲禪師 말씀과 같이 고기의 눈알을 밝은 구슬이라고 가르친 것이 많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을 고요히 비추어 지키라 하나니, 이것은 육근문두六根門頭에 감각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요. 또 일체 마음을 다 쉬고 쉬라는 것이다. 이 쉬는 것이 참 공부라고 가르치나니, 이것은 공적空寂한 것을 지키는 것이요. 또 마음을 쉬고 쉬어서 몸은 고목과 같이 하고, 마음은 찬 재와 같이 하여 아무 분별도 없는 것이 마치 담벼락같이 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도 있나니, 이것은 달마達摩께서 2조 혜가가 밖으로 치구馳求하여 마음을 쉬지 아니하고, 도를 분별심으로 알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 분별심에 결박됨을 구해 주고자 하여 말하길, 혜가도 도를 깨치고자 한다면 밖으로 반연하는 마음을 제거하고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어라. 담벼락같이 하라고 하는 것은 잠시 혜가의 분별에 결박된 마음을 풀어 주신 방편이요, 참 도가 아닌 것인데 우치한 사람이 이것을 가르치니, 참 애석한 것이니라. 또 육칠의식六七意識으로 맑고 맑은 허공과 같은 제8식第八識을 고요히 비추어 안으로 들여다보라고 하니 이것은 제8식으로 도를 삼는 것이요, 또 생각이 일어나든지 생각이 멸하든지 간섭할 것이 없으니, 탕탕무애蕩蕩無碍하여 뜻대로 하라고 하니, 이것은 자연의 체를 지키어 도를 삼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가르치는 것이 다 마군이의 권속이요, 대각성인의 도가 아니니라.
13. 상음想陰이 녹아질 적에 열 가지 경계가 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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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으로 마음을 닦음에 수음은 비록 녹았을지라도 또다시 상음想陰이 있느니라. 다시 용맹정진하여 일심으로 정진精進하면 상음이 녹을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나느니라. 상음이라는 것은 부동浮動하는 망습이니, 낮에는 생각이 되고, 밤이면 꿈이 되느니라. 그러함으로 상음이 녹아지면 꿈이 없어지고 자나 깨나 한결같아 말끔한 허공과 같다. 그러나 이때에 마가 제일 극심하나니, 이 글을 자세히 보라. 첫째는 수음이 다 없어진 사람은 마음이 일정하고 밝아지느니라. 그 사람이 더욱 일심으로만 닦아 가면 허물이 없어지지만 무단히 그 마음이 두렷이 밝은 것을 사량하여 그 정밀한 생각을 날카롭게 하여 잘 공교함을 구함에 그 구하는 마음을 틈타서 하늘 마군이가 그 사람의 심간에 붙어 만 가지 변화를 나타내고, 혹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변재가 한량없어 설법을 잘하게도 하며, 혹 상제의 몸도 나타내며, 부인 몸도 나타내며,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되 그 몸 가운데에서 광명이 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도인인 줄로 믿어 그 교화를 받아 청정계행을 파하고 가만히 음욕을 잠통하느니라. 그러할 뿐만 아니라 또 마귀에게 부림을 받아 온갖 변화를 부리되 어떤 때에는 변고가 나고 어떤 때에는 좋은 일이 있고, 어떤 때에는 겁화가 일어나고, 어떤 때에는 난리가 난다 해서 모든 백성에 재물을 무고히 모두 훼손케 하나니, 자기의 몸에 마군이가 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신도로 하여금 사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참 애석하다. 용성이 만세에 우리 대각교를 믿는 사람은 정도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 글을 기록한다. 나도 지금 노년이라 눈이 어두워 붓을 잡아 기록하기 심히 어렵다. 아무쪼록 이 글을 보고, 사도에 떨어지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부에는 아는 것과 구하는 것이 큰 병이다. 공부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단지 일심의 정성심으로 하여 가면 공부가 순숙하여 자나 깨나 어묵동정에 간단없이 화두가 자연히 들림이 있으리니, 그러할수록 더욱이 단지 한결같이 하여 가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아 모든 마군이에게 속임을 입지 아니할지니라. 상음 가운데에 열 가지 마군의 경계가 있으니, 너무 지루하여 번민증이 나기 때문에 그만 둔다. 그렇지만 추호라도 달리할 생각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며, 설혹 이상한 경계를 볼지라도 마음을 동하지 아니하면 마군이가 자연히 물러나가리라. 구하는 틈을 보든지 알려고 하는 틈을 보든지 무슨 틈을 보든지 그 마음이 동함을 따라 하늘 마군이와 귀신 마군들이 백천 가지 방편을 베풀어 도를 닦지 못하게 방해하느니라. 그 사람이 태산같이 아니하면 마가 부모형제 친척권속이나 친구나 그런 사람에게 붙어 가지고 백방으로 인도하느니라. 마의 신변으로 지나간 일도 다 알게 되고, 돌아오는 일도 알게 되고, 잠시 동안에 여러 만 리를 갔다 왔다 하기도 하고, 앉은 자리에서 천상인간과 지옥, 아귀, 축생을 다 보기도 하나니,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서 참 도덕으로 난 것인가 하여 즐거운 마음을 내어 그 경계를 좇다가 그 마군이의 권속이 되고 만다. 또 마군이의 말은 다분히 음욕도 상관없다. 술과 오신채도 상관없다. 음주식육이 무방반야이다. 이러한 소리를 함에 신도들은 참을 가리어 잡을 수 없다. 근래에는 각법이 더욱 쇠퇴하여 마군이가 대단히 왕성하다. 참으로 신도들은 알 수 없을지니라. 승려의 마군이가 많다. 도는 도인이라야 서로 알지니라. 근래 신도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단이 된 승려나 아니 된 승려나 자기의 친소를 따라 도인이니 선지식이니 하니, 참 애석한 일이다. 하여간 도에 눈이 밝아 가지고도 도인을 알기 어렵거든 어찌 나의 눈이 밝지 못하고 남의 도를 알겠는가. 부디 신도들은 음주와 식육이 무방반야라 하는 승려들이 비록 선지식일지라도 좇아 배우지 마시라.
14. 외도의 종류를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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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능인대성의 도를 닦아 정도를 크게 깨치지 못하고 외도로 떨어지는 것은 외도라도 큰 외도가 되나니, 그 다음에는 족히 말할 것도 없다. 능인의 도는 다만 일심만 닦아 성취되는 것이요, 하늘이나 귀신이나 그것들을 섬겨서 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면 어찌하여서 일심을 닦는 가운데에도 외도로 빠지는가? 이에 자세히 들으시라. 범부가 처음으로 능인의 도에 발심하여 일심으로 도를 닦음에 점점 마음이 새지 아니하여 일정한 성품이 태산과 같다. 그러한 때에 장차 색음色陰이 공空하나니, 이 경지에 당하면 산하석벽이 걸림이 없이 몸이 아무데나 들어 다닌다. 그때에는 그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되 내가 위없는 도를 얻었다 하여 제 마음으로 모든 마업魔業을 지으며, 또다시 그 전에 색음이 녹은 경계는 비록 팔리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수음受陰이 녹음을 얻으며, 마음을 떠나 온갖 곳에 나아가 놀다가 돌아오느니라. 비유컨대 사람이 집을 떠나가다가 도로 돌아오는 것과 같나니, 이때 그 사람이 위없는 도를 얻은 것으로 인증하여 가지가지 뜻을 내거든 밖으로 하늘 마군이와 대력마왕大力魔王들이 그 사람의 마음에 틈남을 따라 그 뜻대로 이루게 하기에 이 사람이 미혹하여 정도를 알지 못하고, 마도에 떨어지느니라. 또 그 사람이 이것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심으로 견고하게 닦다가 행음行陰이 녹아지면 마음이 고요하고 말끔한 것이 청명한 허공과 같아져야 천류遷流하는 상이 다하며, 꿈이 아주 없어지리라.낮에 생각이 밤에 꿈이 되느니라. 일어난 경지에 이르면 하늘 마군이와 대력귀왕은 능히 도를 흩어지게 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스스로 집을 짓고 들어 앉아 외도가 되느니라. 대저 행음은 만 가지를 화하여 내는 생멸生滅의 근원根元이 되기 때문에 태란습화 십이유생十二類生의 근원을 보지 아니함이 없기에 문득 아는 것을 내어 외도가 되나니, 이것은 행음이 허망한 줄을 알지 못한 탓이며, 또 식음이 생명에 근본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15. 행음과 식음이 다 녹지 못하고 그 가운데 앉아 외도 됨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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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색수상행음色受想行陰이 텅 빔에 일체중생이 이곳에 나서 저곳에서 죽는 것을 알지 못함이 없으나 과거로 팔만 겁 전 일은 알고, 미래에 팔만 겁 뒷일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팔만 겁 전에는 천지 세계가 생긴 원인이 없다고 하여 인因 없는 논을 세움으로 정지견을 잃어버렸나니, 이것이 무인외도가 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말하길, “물질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사람이요 축생은 본래 축생이다.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이요 따오기는 본래 흰 것이며, 인천人天은 본래 서서 다니는 것이요 축생은 본래 가로로 다니는 것이니, 흰 것은 씻어서 흰 것이 아니요 검은 것은 물들여서 검은 것이 아니니, 일체 물건이 필경 인因이 없는 것이라.”라고 하나니, 이것은 끝머리가 인이 없다는 외도니라. 셋째는 상음이 녹아지면 마음과 경계가 다하기 때문에 이 만겁 가운데에 일을 다 아나니, 이 사람이 나는 것과 멸하는 것을 쓸어버리고 별도로 떳떳함을 헤아리나니, 이것은 마음과 경계와 두 가지 성품을 다하여 생멸을 다 쓸어버리고, 뚜렷하고 떳떳함을 세우는 외도니라. 넷째는 혹 나고 혹 멸하는 것을 헤아려 떳떳함을 삼는 것이니, 이 사람이 이 말을 하길, 지수화풍 사대를 의지하여 생멸이 있을지라도 사대의 원소는 항상 멸하지 아니하나니, 모든 법이 생멸하는 자체가 다 떳떳함이라고 헤아리는 것이니, 이 상견도 능히 만겁 일을 다 알아지느니라. 다섯째는 여덟째 알음알이가 청정하여 허공과 같음을 보고 이것을 집착하여 도를 삼는 것이니, 이것이 무명의 뿌리가 됨을 알지 못한 연고니라. 이 외도는 제8신식을 그릇 알아 도를 삼는 것이니, 능히 팔만 겁 일을 아는 것이니라. 여섯째는 혹 사견을 일으키어 떳떳함을 삼는 것이니, 저 사람이 망령되이 말하길, “생멸은 상음에 속하는 것이다. 이제 상음이 다 멸하였으니, 영혼이 생멸이 없는 성품은 행음에 속한 것이라.”라고 하니, 참 우치하다. 행음이 곧 생멸에 근원이 됨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것을 통틀어 이름하여 상견외도라 하니라.
16. 상무상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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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나는 떳떳하고 다른 이는 무상하다 하는 것이니, 나의 말끔한 성품은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어리어 없어지지 아니하거든 일체중생이 다 나의 맑은 성품 가운데에 스스로 일어났다가 멸하였다가 하느니라. 그러므로 나 하나만 떳떳한 것이요, 일체중생은 다 무상한 것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팔식을 지키는 외도니라. 고금외도가 단견과 상견에 더 벗어남이 없으니 그만 두고자 한다.
대각응화 2939년 6월 초7일 대각교 삼장역회 용성 백상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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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資者
001『少室六門』 「第二門破相論」(『大正新脩大藏經』 48, 366c~369c); 『達磨大師破相論』(『卍新纂續藏經』 63, 8c~11c); 編輯 鏡虛惺牛, 懸吐 雪峰鶴夢, 新刊懸吐 『禪門撮要』(범어사, 1968), pp.123~135.達磨의 『觀心論』은 『大正新脩大藏經』과 『卍新纂續藏經』에서는 『破相論』이라고 한다. 근래의 학자들에 의해서 弘忍의 저술임이 밝혀졌다.
002앞에 다음 구절이 생략되었다. “慧可ㅣ問曰 若復有人이 志求佛道인댄 當修何法하야사 最爲省要닛고”(혜가慧可가 묻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뜻으로 불도佛道를 구하려 한다면 마땅히 어떤 법을 닦아야 가장 간략한 요점이 되겠습니까?”)編輯 鏡虛惺牛, 懸吐 雪峰鶴夢, 新刊懸吐 『禪門撮要』(범어사, 1968), p.123; 『達磨大師破相論』(『卍新纂續藏經』 63, 8c) “論曰 若復有人 志求佛道者 當脩何法 最爲省要”; 『少室六門』 「第二門破相論」(『大正新脩大藏經』 48, 366c) “問曰 若復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용성대종사전집』 제4집의 『禪門撮要』 원문(p.451)에는 기재되어 있다.
006『少室六門』 「第二門破相論」(『大正新脩大藏經』 48, 366c)에는 ‘法’으로 되어 있으며, 용성 선사본, 編輯 鏡虛惺牛, 懸吐 雪峰鶴夢, 新刊懸吐 『禪門撮要』(범어사, 1968), p.123에는 ‘行’으로 되어 있다.
007『少室六門』 「第二門破相論」(『大正新脩大藏經』 48, 366c), 『達磨大師破相論』(『卍新纂續藏經』 63, 8c), 編輯 鏡虛惺牛, 懸吐 雪峰鶴夢, 新刊懸吐 『禪門撮要』(범어사, 1968), p.123에는 ‘猶’로 되어 있고, 용성 선사본에는 ‘譬’로 되어 있다.
008앞에 다음 구절이 생략되었다. “又問曰 云何觀心이 稱之爲了닛고”(또 묻기를,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그것을 일컬어 깨닫는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編輯 鏡虛惺牛, 懸吐 雪峰鶴夢, 新刊懸吐 『禪門撮要』(범어사, 1968), p.123이고 『少室六門』과 『達磨大師破相論』에는 ‘又’ 이하가 없다.
009『少室六門』과 『達磨大師破相論』에는 “菩薩摩訶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가 첨가되어 있다.
010『少室六門』과 『達磨大師破相論』에는 ‘蘊’이 ‘陰’으로 되어 있고, 『少室六門』에는 ‘法界’가 첨가되어 있으며, 『少室六門』과 『達磨大師破相論』에는 모두 ‘離’가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互不相生’은 『少室六門』에는 ‘合互相待’, 『達磨大師破相論』에는 ‘互相因待’라고 하였다. 하지만 『禪門撮要』와는 동일하다.
019앞에 다음 구절이 생략되었다. “又問 六賊三毒은 廣大無邊이어늘 若唯觀心하면 何由免無窮之苦닛고”(또 묻기를, “육적과 삼독이 광대무변하거늘 만약 오직 마음만 보고 무엇으로 말미암아 무궁한 고통을 면합니까?”)『少室六門』과 『達磨大師破相論』에는 ‘六趣三界’라 하였고, 『禪門撮要』에서는 ‘六賊三毒’이라 하였고 ‘云’이 첨가되었다. 여기서는 전자를 따라 번역하였다.
021『少室六門』과 『達磨大師破相論』에서는 “故名三界 由此三毒 造業輕重 受報不同 分歸六處 故名六趣”라고 하였다. 또 『禪門撮要』에서는 “又三毒造業輕重으로 受報不同하야 分歸六處故로 名六趣니라”가 첨가되어 있다. 역자의 첨가가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022앞에 다음 구절이 생략되었다. “又問云何輕重이 分之爲六이닛고”(또 묻기를, “어떻게 가볍고 무거운 그것이 나누어져 여섯이 됩니까?”)
023앞에 다음 구절이 생략되었다. “又問曰如佛所說하야 我於三大阿僧祇劫에 無量勤苦하야 方成佛道라 하셨거늘 云何今說 唯只觀心而制三毒을 則名解脫이닛고”(또 묻기를, “저 각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저 아승기겁阿僧祗劫에 한량없이 부지런히 애써서 바야흐로 각도를 이루었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지금에 설한 것은 오직 다만 마음만을 관해서 삼독을 제거하면 곧 이름하여 해탈한다고 합니까?”)
046앞에 다음 구절이 생략되었다. “又問曰經所說言에 至心念佛하면 必得往生西方淨土라 하시니 以此妙門으로 則應成佛이어늘 如何觀心하야 求於解脫이닛고.”(또 묻길, “경에서 말씀하신 것에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라고 하시니, 이 묘문으로 곧 응당히 깨달음을 이루거늘 어떻게 마음을 관해서 해탈을 구합니까?)
047『高麗國普照禪師修心訣』(『大正新脩大藏經』 48, p.1006a)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離此心外 無佛可成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여기서 ‘佛’과 ‘如來’, ‘世尊’은 모두 ‘大覺’으로, ‘佛’은 ‘覺’으로 바꿨다. 이는 조선시대의 부처님을 폄하하는 내용을 경계한 의도로 여겨진다.
051『高麗國普照禪師修心訣』(『大正新脩大藏經』 48, p.1006c) “旣不知方便故로 作懸崖之想하야 自生退屈하며 斷覺種性者가 不爲不多矣로다 旣自未明일새 亦未信他의 旣有解悟處하고 見無神通者하면 乃生輕慢하야 欺賢誑聖하니 良可悲哉로다”(이미 방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물러날 생각을 내며, 깨달음의 종성을 끊는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미 스스로 아직 밝히지 못하였기에, 또한 아직 다른 이가 이미 깨달아 아는 곳을 믿지 못하고 신통이 없다고 보는 자는 이에 가볍게 교만을 내어서 현인을 속이고 성인을 속임이니 진실로 가련하다.) 이상의 내용을 빠뜨렸다.
052『高麗國普照禪師修心訣』(『大正新脩大藏經』 48, p.1006c) “汝言頓悟 漸修兩門 千聖軌轍也”(그대가 몰록 깨닫고 점차 닦는 두 문호가 일천 성인의 법 수레바퀴라고 말하였는데,)를 생략하였다.
061『高麗國普照禪師修心訣』(『大正新脩大藏經』 48, p.1009b)에 ‘給’이 ‘養’으로 되어 있다.
062다음 구절이 생략되었다. “吾若無心이면 因何解答汝하며 汝若無心이며 因何解問吾리오 問吾가 卽是汝心이니라”(내가 만약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인해서 네게 답할 줄 알며 네가 만약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인해서 내게 물을 줄 알겠는가. 내게 묻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少室六門』, 「第六門血脈論」(『大正新脩大藏經』 48, p.373b); 『達磨大師血脈論』(『卍新纂續藏經』 63, p.2b); 編輯 鏡虛惺牛, 懸吐 雪峰鶴夢, 新刊懸吐 『禪門撮要』(범어사, 1968), p.111 모두 동일하다.
087『博山禪警語』(『卍新纂續藏經』 63, p.759c)에 이하의 내용이 생략되었다. “做工夫호대 不只是念公案이니 念來念去인들 有甚麽交涉이리요 念到彌勒下生時하야도 亦沒交涉이니 何不念阿彌陀佛하야 更有利益고 不但敎不必念이라 不妨一一擧起話頭니 如看無字인댄 便就無上하야 起疑情하고 如看栢樹子인댄 便就栢樹子하야 起疑情하고 如看一歸何處인댄 便就一歸何處하야 起疑情하고 疑情이 發得起하면 盡十方世界가 是一箇疑團이라 不知有父母身心하며 不知有十方世界하며 非內非外輥成一團하얀 一日 如桶篐自爆하리라 再見善知識하면 不待開口而大事了畢의하라”(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염하지 말지니, 염해 가고 염해 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염하여 미륵불이 나오실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소용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염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각기 화두를 거각할지니, 무자無字를 한다면 무자 상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 백수자栢樹子를 간한다면 백수자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 일귀하처一歸何處를 한다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고 의심할지니, 의심이 일어나면 온 시방세계가 한낱 의심덩어리라. 부모나 제 몸과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며, 시방세계가 있는 줄도 모르며 안팎이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하루아침에 통잡桶篐이 저절로 터지듯 하리니, 선지식을 다시 친견하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큰일을 해 마치리라.)
088이상은 원문의 내용과는 다른 용성 선사의 번역이지만 원문의 내용을 따라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089여기까지의 번역은 원문에는 없다. 다만 『五家正宗贊』(『卍新纂續藏經』 78, pp.582c~583a)에 “一日參山 方跨門 便問 是凡是聖 山便喝 師禮拜 有僧擧似洞山 山曰 若不是奯公 大難承當 師曰 洞山老人不識好惡 錯下名言 我當時一手抬一手搦”라고 하였다.